2화
‹ ›[경고: 상고 보물의 각성이 감지되었습니다.]
그 문구가 시야 한복판에 딱 박힌 채로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여봐도, 심지어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봐도 그 자리에 그대로 떠 있었는데, 마치 누가 내 눈알에 스티커를 붙여놓은 것 같았다. '이거 지우는 법이 있나' 하는 실없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그 아래로 이어지는 두 번째 문장을 읽는 순간 그런 여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계약자 남소백에게 고지합니다. 상고 보물이 완전히 각성하기까지 남은 시간: 47일. 기한 내에 보물을 회수하지 못할 경우, 계약자는 존재를 상실합니다.]
'존재를 상실한다'는 문구를 나는 아마 열 번쯤은 다시 읽었을 것이다. 처음엔 그냥 죽는다는 뜻인가 싶었는데, 다시 보니 굳이 '존재'라는 단어를 쓴 게 마음에 걸렸다. 죽는 거면 그냥 죽는다고 쓰면 될 텐데, 왜 굳이 '존재를 상실한다'는 표현을 골랐을까. 어쩌면 죽는 것보다 더 지독한 무언가를 뜻하는 게 아닐까 — 존재 자체가 지워진다는 건, 이 세상에 내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더 무서워졌다. 죽음은 적어도 무덤은 남기니까.
아영은 내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공을 노려보는 걸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는데, 얇은 베일 위로도 그 당황한 표정이 훤히 드러났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하고 그녀가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계약자'라는 단어가 계속 맴돌고 있었다. 계약자라니. 나는 누구와도 계약을 맺은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살아왔으니까. 밥 한 끼를 위해 누구에게 목숨을 저당 잡힌 적도 없었고, 사막의 정령이나 마물과 거래를 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계약자라니, 이건 뭔가 잘못된 알림이 아닐까 하는 헛된 기대도 잠깐 품어봤지만, 문구는 여전히 뻔뻔하게 그 자리에 떠 있었다.
그 순간, 다섯 해 전의 기억이 갑자기 지독하게 선명한 색으로 되살아났다. 이 오아시스에 처음 정착했을 때, 나는 물을 구하기 위해 손수 땅을 파서 우물을 만들었다. 그때 나는 아직 열몇 살짜리 애송이였고, 삽질 한 번이면 물이 콸콸 솟아날 거라고 순진하게 믿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파도 파도 흙만 나왔다. 하루, 이틀, 사흘…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그게 터지고 굳어서 딱지가 될 때까지도 물길은 나오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내가 자리를 잘못 잡았다고 수군댔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여기를 파야 한다는 확신이 들어서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마지막 삽질에서 바닥이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감각이 지금도 발바닥에 생생했다 — 마치 딱딱한 널빤지 위를 걷다가 갑자기 얇은 종이 위로 발을 내디딘 것 같은, 그 순간적인 무중력감. 나는 균형을 잃고 그대로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몇 초였는지 몇 분이었는지도 가늠이 안 되는 낙하 끝에, 나는 지하 암천이라 불릴 만한 거대한 공간에 널브러졌다. 그 아래는 캄캄했지만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는데,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푸른 광채가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그 빛을 따라 눈을 돌리자 끝없이 흐르는 새까만 물줄기가 보였다. 그리고 그 물줄기 안에서, 뭔가가 나를 향해 손을 뻗는 듯한 감각을 느꼈던 기억이 났다. 손가락 같은 것이 물 표면을 가르고 올라와 내 발목을 스치듀 지나갔던, 그 서늘하고 축축한 감촉. 당시엔 너무 어렸고, 그저 무섭기만 해서 비명도 못 지르고 손톱이 다 부러지도록 벽을 긁으며 기어 올라왔던 걸로 기억한다. 올라오자마자 우물 입구를 대충 돌로 덮어버리고는, 그 뒤로 오 년 동안 그 일을 애써 잊고 살았다. 그게... 계약의 순간이었던 걸까. 그렇다면 나는 오 년 동안 시한폭탄을 몸에 심어놓고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온 셈이었다.
"...설명 좀 해봐, 소백. 얼굴이 사색이 됐어" 하고 아영이 다급하게 내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이 생각보다 힘이 세서, 나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좀 돌아왔다. 애써 침착한 척하며 방금 본 문구를 그대로 읊어주었는데, 말을 하면서도 내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사막의 바람 소리만 우리 사이를 채우는 그 몇 초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는데, 이내 그녀는 베일 아래로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개사긴데?" 그녀가 중얼거렸는데, 그 말이 지금 내 심정을 가장 정확하게 대변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상황이 웃긴 게 아니라, 웃지 않으면 진짜로 주저앉을 것 같아서 그랬을 뿐이었다.
[상고 보물과 계약자 사이의 연결 고리가 재활성화되었습니다. 지하 암천의 권능 일부가 봉인 해제됩니다.]
두 번째 문구가 뜨는 순간, 나는 손끝이 저릿한 걸 느꼈다. 그건 마치 오랫동안 눌러놨던 모래주머니가 갑자기 사라진 듯한 감각이었는데, 두 다리로 서 있는데도 몸이 살짝 뜬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손가락을 몇 번 접었다 펴봤는데, 관절 마디마디에서 뭔가 삐걱거리던 낡은 나사가 갑자기 기름칠 된 느낌이었다. 몸이 이상하게 가벼워졌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와 동시에 이게 좋은 신호인지 나쁜 신호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힘이 붙는다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그 힘의 근원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라면, 그건 축복이 아니라 빚에 가까운 게 아닐까.
"자, 그러니까 정리하면" 하고 나는 최대한 담담한 척 입을 열었다. 이럴 때는 말로 정리하는 게 그나마 정신을 붙잡는 방법이었다. "내가 다섯 해 전에 우물을 파다가 상고 보물이랑 뭔가 계약을 맺었고, 이제 그놈이 완전히 깨어나기 전까지 나도 뭔가를 해야 하는데, 안 하면 죽는다는 거네."
"...대충 그렇게 되네." 아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남 일처럼 말하는 그 태도가 조금 얄미웠지만, 지금 저 여유가 아니었으면 나는 이미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을 거다.
"47일이라니, 사막을 가로질러서 상고 보물이 있다는 곳까지 갈 시간도 부족하지 않아? 여기서 가장 가까운 상고 유적까지만 해도 최소 보름은 걸리는데." 내가 손가락으로 날짜를 세어가며 되묻자, 그녀는 뭔가 알고 있다는 듯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래서 내가 왔지. 위치는 대충 짐작이 가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게 그냥 우연한 방문이 아니었다는 걸 다시금 확인했다. 화나비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정보를 대가 없이 주는 척하면서, 결국 나를 자기 판에 끌어들이는 것.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우연히 지나가던 길에 들렀다는 듯 굴었지만, 저 여자가 사막을 그렇게 우연히 가로지르는 걸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근데 소백, 너 그거 알아?"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그 낮은 목소리가 오히려 더 불안하게 들렸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사막의 큰손들이 다 움직이고 있다는 거. 마왕의 부하들도 벌써 정찰을 시작했다더라."
마왕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나는 조금 다른 의미로 표정이 굳었다. 그 이름과 나 사이에는 아영이 모르는 사연이 조금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조금이 아니라 꽤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이야기를 꺼낼 때가 아니었다. 47일이라는 시한폭탄을 가슴에 안은 지금, 거기에 마왕의 부하들까지 끼어든다면 이건 그냥 시한폭탄이 아니라 도화선에 불붙은 시한폭탄인 셈이었다.
"큰손들이라니, 구체적으로 누구?" 내가 묻자 아영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이름을 셌다.
"북부의 상단 연합, 동쪽 사막 부족 셋, 그리고 어디서 소문 들었는지 남쪽 용병단까지. 다들 상고 보물이 완전히 각성하면 그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믿고 있어. 근데 정작 그 계약자가 누군지는 아무도 몰라. 알면 벌써 여기 몰려왔겠지." 그녀가 태연하게 말했지만, 나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저 정보가 새어나가는 순간, 이 오아시스는 순식간에 사냥터로 변할 것이다.
"일단 47일이라는 시한이 걸렸으니, 게으름 피울 시간은 없겠네" 하고 나는 애써 가볍게 넘기려 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계산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47일에서 보름을 이동에 쓴다면 남는 시간은 채 한 달도 안 되는데, 그 안에 지하 암천에서 느꼈던 그 이상한 힘의 실체를 파악하고, 보물을 회수하고, 게다가 마왕의 부하들과 다른 큰손들의 눈을 피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목숨을 걸고 사막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사실이, 생각할수록 더럭 겁이 났다. 그리고 그 힘이 정확히 뭔지도 모르는 채로 몸을 던진다는 게, 냉정하게 생각하면 자살 행위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면 되는데?" 내가 묻자 아영은 씩 웃으며 사막 남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 정확히는 아직 모르지만, 방향은 확실해." "방향만 안다는 거잖아, 그거." 내가 지적하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피했다. 저 태연함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그날 밤, 나는 오랫동안 방치해뒀던 우물 앞에 서서 캄캄한 물속을 내려다보았다. 돌로 덮어놨던 입구는 오 년 동안 모래에 반쯤 파묻혀 있었는데, 오늘 낮에 아영과 함께 다시 돌을 치우고 나니 그 아래에서 여전히 서늘한 공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섯 해 전 그날처럼, 뭔가가 나를 부르는 듯한 감각이 다시 스쳤고, 이번엔 그게 두려움보다는 이상한 익숙함처럼 느껴졌다. 마치 오래전에 헤어진 누군가가 다시 손을 내미는 것 같은, 그런 기묘한 감정이었다.
나는 두 손을 꽉 쥔 채 그 어둠 속으로 다시 내려갈 결심을 굳혔다. 47일. 그 숫자가 머릿속에서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흐르는 것 같았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우물 아래로 첫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