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문을 열자 그 자리에 위철이 서 있었다.
낮의 갑옷을 벗고 평범한 관복을 입은 채였다.
어깨에 남은 갑옷의 자국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등 뒤로 늘어선 복도의 등불이 그의 얼굴 반쪽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이 시간에 찾아온 것을 용서하십시오."
그가 낮게 말했다.
목소리에 미묘한 긴장이 섞여 있었다.
"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급한 일인가.)
낮에 있었던 각성식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몸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서 물러설 수 없는 무게가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안으로 들였다.
나는 그를 서재로 들였다.
소은에게는 자리를 비켜 달라 일렀다.
소은은 잠시 나를 살피더니 말없이 문을 닫고 물러갔다.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멀어졌다.
둘만 남은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촛불 하나가 서재 구석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 빛이 위철의 관복 위로 스며들어 옷의 주름을 따라 그림자를 만들었다.
위철이 품에서 작은 목함을 꺼냈다.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선황 폐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가 목함을 두 손으로 받쳐 내밀었다.
탁.
목함이 서재 탁자 위에 놓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그것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선황이... 나에게.)
나는 목함을 받아 열었다.
경첩이 삐걱거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안에는 작은 옥패가 들어 있었다.
용의 형상이 새겨진, 짙푸른 빛의 패였다.
촛불에 비친 그 빛깔이 어딘가 낯설게 일렁였다.
(천용령...)
전생의 기억 속에서도 그 이름만 들어본 적 있는 물건이었다.
선황이 남긴, 대천국 황실의 진짜 권위를 상징하는 령패.
전생에서는 소문으로만 떠돌았을 뿐, 실물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것이 지금 내 손 위에 놓여 있었다.
"이것이... 천용령입니까."
내가 묻자 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선황께서는 전하께서 각성식에서 어떤 결과를 얻으시든, 이것을 전해드리라 명하셨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돌아가시기 전, 폐하께서는 이미 짐작하고 계셨던 듯합니다."
정적이 흘렀다.
촛불이 한 번 크게 흔들리다 다시 잦아들었다.
(무엇을 짐작했다는 거지.)
나는 옥패를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서 온몸으로 퍼졌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었다.
마치 이 패가 나를 알아보는 듯한 감각.
심장 안쪽에서 낯선 파문이 한 번 일었다가 가라앉았다.
나는 옥패를 손바닥 위에 얹고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생각보다 가벼웠다.
그런데도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감각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 령패의 힘이 무엇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위철이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사실을 말하면, 전생의 기억으로는 이 령패의 정확한 용도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존재만은 확실했다.
"단지 이름만 들어본 적이 있을 뿐이다."
내가 낮게 대답했다.
위철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는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대신 자세를 조금 더 낮추며 말을 이었다.
"이 패는 대천국 황실의 뿌리와 연결된 신물입니다."
위철이 말을 이었다.
"섭정대군들도 이 패의 존재는 모릅니다. 오직 저와 몇몇 천용대 원로만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가 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에는 두려움과 확신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전하, 폐무혼으로 판정되신 오늘, 이것이 유일한 희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희망이라..."
나는 그 말을 되뇌었다.
입안에서 그 단어가 낯설게 굴러다녔다.
폐무혼.
오늘 낮 그 말을 듣던 순간의 냉기가 아직도 등줄기에 남아 있었다.
"위철."
내가 그를 불렀다.
"그대는 어째서 이것을 지금 나에게 가져온 것인가. 선황께서 명하셨다 하나, 다른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위철이 잠시 침묵했다.
그의 시선이 목함 위에 머물렀다.
"선황께서는... 이 패를 가장 위태로운 순간에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그가 다시 나를 보았다.
"저는 오늘이 바로 그 순간이라 판단했습니다."
나는 목함을 조용히 닫았다.
탁.
경첩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
(선황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 내가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아니면 최소한 내 안에 뭔가 숨겨진 것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 가능성이 마음 깊은 곳을 무겁게 눌렀다.
만약 선황이 정말로 짐작했다면.
그 짐작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
나는 그 답을 이제 물을 수 없는 사람에게 묻고 싶어졌다.
그러나 선황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었다.
남은 것은 이 차가운 옥패와, 그것을 전해준 사람의 낮은 목소리뿐이었다.
위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복이 스치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 일은... 당분간 비밀로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
"전하."
그가 문 앞에서 다시 돌아섰다.
"부디, 몸을 보중하십시오."
그 말을 남기고 그는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섰다.
그가 방을 나서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멀어지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옥패를 손에 쥐고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촛불의 그림자가 벽 위에서 느릿하게 흔들렸다.
창밖에서 벌레 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유설아.)
불현듯 그 이름이 떠올랐다.
오늘 각성식장에서 마주친 그녀의 시선이 자꾸 마음에 남아 있었다.
전생에서는 그녀와 함께 이 태자궁의 정원을 걸었던 기억이 있었다.
매화가 흩날리던 봄날, 그녀의 손을 잡고 걸었던 그 길.
순수했던 시절.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믿었던 시절.
(넌 처음부터 나를 사랑한 적이 없었지.)
괄호 속의 생각이 씁쓸하게 맺혔다.
북천대군의 딸로 태어나, 처음부터 나를 무너뜨리기 위한 도구로 키워진 여인.
그녀가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에는 죄책감조차 없었다.
그저 임무의 완수.
그것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를 미워하는 것보다, 그리워하는 감정이 먼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게 무슨 어리석은 감정이지.)
나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 비웃음 속에도 진심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결핍이 숨어 있었다.
전생에서 나는 누구에게도 진심으로 기대지 못했다.
풍류대제라는 이름은 화려했지만, 그 이름 뒤에는 누구도 채워주지 못한 공허가 있었다.
유설아가 그 공허를 처음으로 채워주는 듯 보였을 때, 나는 어쩌면 지나치게 쉽게 그녀를 믿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믿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번에는 다르다.)
나는 옥패를 손에 꽉 쥐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 안에서 점점 온기를 띠는 듯했다.
(이번에는 누구도 나를 함정에 빠뜨리게 두지 않을 거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매화 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평온했던 밤과 다르지 않았지만, 이제는 어딘가 삐걱거리는 듯한 울림으로 들렸다.
낮의 요기와, 위철의 문양, 그리고 천용령까지.
하룻밤 사이 너무 많은 것이 밀려들었다.
나는 옥패를 서랍 깊숙한 곳에 넣고 열쇠로 잠갔다.
철컥.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다시 한 번 갈랐다.
(당분간은 숨겨야 한다. 이 패의 존재도, 내 안의 힘도.)
결심을 다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밖 하늘은 다시 잔잔했다.
별빛이 몇 점,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잔잔함이 이제는 더 이상 온전한 평온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태자궁 안에는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다.
태자가 폐무혼으로 각성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궁 전체를 돌았다.
복도를 지나는 시녀들의 대화가 나를 보는 순간 뚝 끊겼다.
나를 대하는 시선들이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예전에는 존중이 담겼던 인사가, 지금은 형식적인 예만 남아 있었다.
고개를 숙이는 각도조차 예전보다 얕아졌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나는 애써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도, 태자궁 관원들과의 짧은 인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소문의 이면에서, 나는 또 다른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었다.
북천대군 측 사람들이 궁 안팎에서 유난히 자주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평소라면 태자궁 근처를 얼씬거리지도 않던 이들이었다.
정원을 가로지를 때, 담장 너머로 낯선 관복 몇이 지나갔다.
그들은 나를 보고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지만, 시선만은 오래도록 붙잡혀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언제나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