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숨겨둔 사병 300명

1화

밤안개가 운천성 외곽의 폐창고를 감싸고 있었다. 축축한 습기가 옷깃을 파고들었다. 정헌은 담장 위에 몸을 낮춘 채 숨을 죽였다. 열다섯 해하고도 열한 달, 겉으로는 아직 앳된 소년의 몸이었으나 그 안에 든 것은 서른 해를 넘게 살아본 자의 눈이었다.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 희미한 밤, 그는 그림자와 한 몸이 된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늘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 그는 속으로 되뇌며 창고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응시했다. 창틈으로 흘러나오는 등불은 바람이 불 때마다 미세하게 흔들렸고, 그 흔들림의 간격으로 정헌은 안쪽의 인원과 대략적인 위치를 가늠했다. 안에는 여섯이었다. 정가(鄭家)의 물류 장부를 빼돌려 외부에 넘기려는 자들. 정명석이 보름 전부터 뒤를 캐어 오늘에서야 자리를 확정한 건이었다. 처음 정명석이 이 일을 보고했을 때, 정헌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저 또 하나의 자잘한 잡음, 정가라는 작은 세력이 늘 겪어야 하는 소모전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여섯이면 충분히 조용히 끝낼 수 있다.' 정헌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스쳤다 사라졌다. 그는 담장에서 소리 없이 뛰어내렸다. 발바닥이 땅에 닿는 순간에도 흙먼지 하나 일지 않았다. 다섯 걸음, 문 앞. 손끝으로 문틈을 살짝 밀자 삐걱거림 없이 열렸다. '경첩에 기름칠까지 해뒀군. 준비성 하나는 철저해.' 정헌은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온기와 사람 냄새를 맡으며 잠시 멈춰 섰다. 안쪽에서 나직한 대화 소리가 들렸다. 돈 이야기, 물량 이야기, 그리고 누군가의 이름 하나가 스치듯 지나갔다. 정헌은 그 이름을 마음 한구석에 새겨 넣었다. "거기 누구냐!" 안쪽 사내 하나가 먼저 그를 발견했다. 등잔불 아래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헌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발끝으로 지면을 박찼다. '퍽―!' 주먹이 사내의 명치에 꽂혔다. 정헌은 힘의 팔 할을 죽인 채였다. 본래라면 오만 근에 이르는 완력이 실린 주먹,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건 그저 무예를 조금 익힌 소년의 일격처럼 보이도록 조절한 힘이었다. '너무 세면 곤란해. 딱 죽지 않을 만큼, 딱 다시는 못 일어날 만큼.' 이 균형을 맞추는 것이 사실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전생의 감각으로는 손끝 하나 튕기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몸을 걸레짝처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몸으로, 이 세계에서, 그는 아직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사내가 신음도 못 내고 고꾸라졌다. 나머지 다섯의 시선이 일제히 정헌에게 쏠렸다. 등잔불이 그의 얼굴을 어렴풋이 비췄다. 앳된 얼굴, 그러나 눈빛만은 서늘했다. "애송이가··· 여긴 어떻게 알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이 등불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정헌은 그 검이 그리는 궤적을 눈으로 좇았다. '느리다. 초식도 어설프고. 이 정도면 굳이 검을 쓸 필요도 없겠어.' 사내의 어깨가 먼저 움직이고, 그다음 팔꿈치, 그다음에야 손목이 따라왔다. 순서가 뒤엉킨 형편없는 검로였다. 전생이었다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삼류 초식. '휘릭―!' 검이 허공을 갈랐다. 정헌은 반보 물러서며 검신을 스치듯 피했다. 옷자락이 서늘하게 갈라지는 소리만 남았다. 사내는 자신의 검이 허공만 가른 것에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틈이 곧 죽음의 틈이었다. 정헌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사내의 손목을 낚아챘다. '우두둑―' 손목이 꺾이는 소리에 사내가 비명을 삼켰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무릎이 절로 꺾였다. 정헌은 그대로 몸을 회전시켜 사내를 바닥에 메다꽂았다. 등이 땅에 닿는 소리가 창고 안에 둔탁하게 울렸다. 남은 넷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정헌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 번에 셋을 상대하는 건 이 몸으로도 쉽지 않지만···' 그는 낮게 자세를 잡으며 숨을 골랐다. 왼편에서 도끼를 든 사내가 파고들었고, 오른편에서는 단창을 쥔 사내가 찔러 왔으며, 정면에서는 맨손의 사내가 주먹을 뻗어 왔다. 세 개의 공격이 삼각의 형태로 정헌을 옥죄었다. '퍽, 퍽, 챙―!' 짧은 순간 세 번의 타격음이 연달아 울렸다. 정헌의 몸이 마치 물처럼 흘러 도끼의 궤적을 비껴가고, 그 흐름 그대로 단창의 창대를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창대가 옆으로 튕겨 나가는 순간 그의 팔꿈치가 맨손 사내의 턱을 스쳤다. 두 명이 쓰러졌고, 하나는 병장기를 놓친 채 뒷걸음질 쳤다. 마지막 하나가 창고 뒤편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의 발소리가 다급하게 바닥을 울렸다. 정헌은 그 뒷모습을 향해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부는 어디 있지." 도망치던 사내의 발이 멈췄다. 정헌의 목소리에는 나이답지 않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저 담담한 물음일 뿐인데, 그 안에 담긴 압력은 검을 들이대는 것보다 무거웠다. '기척도 없이 압도한다는 게 이런 걸까.' 사내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저, 저기 궤짝 안에···" 정헌은 궤짝을 열어 장부 뭉치를 확인했다. 종이 뭉치는 손때가 묻어 있었고, 먹물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걸 보아 최근까지 계속 손을 댄 흔적이 역력했다. 정가의 상단 거래 내역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물량과 시기, 거래처 이름, 그리고 낯선 인장 하나가 마지막 장에 찍혀 있었다. 그는 그것을 품에 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쓰러진 자들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그중 몇은 이미 정신을 잃은 듯했다. "누구 사주를 받았나." 대답은 없었다. 사내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피했다. 정헌은 굳이 재촉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들의 입에서 나올 대답은 정명석이 이미 캐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오히려 재촉하는 순간 이들이 겁에 질려 엉뚱한 소리를 지껄일 가능성이 더 컸다. 그는 몸을 돌려 창고를 나섰다. 등 뒤에서 신음 소리가 이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문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처음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고요했다. 달빛 아래, 그의 가슴팍 옷깃 사이로 희미한 흉터가 드러났다 사라졌다. 청동으로 빚은 솥, 청동정(靑銅鼎)의 문양이었다. 세 개의 다리와 그 위를 휘감은 알 수 없는 고문자. 문양은 그의 심장 바로 위쪽에 새겨져 있었고, 달빛을 받을 때마다 미묘하게 색이 짙어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정헌은 손끝으로 그 자리를 무심코 매만졌다. '이 문양이 대체 왜 내 몸에 새겨진 건지···' 전생의 기억을 아무리 뒤져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서른 몇 해를 살아오며 온갖 기이한 것들을 보고 겪었으나, 이 청동정의 문양만큼은 그 어떤 기억의 서랍을 뒤져도 걸리는 것이 없었다. 마치 이 세계에 다시 태어나면서 새로 얻은 것처럼. 담장 밖, 어둠 속에서 한 그림자가 조용히 움직였다. 정명석이었다. 그는 창고 안의 참상을 확인하고는 낮게 혀를 찼다. 쓰러진 자들의 수를 세어 보던 그의 눈매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또 힘을 죽이셨습니까." "보는 눈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정헌의 대답은 담담했다. 정명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처리를 위해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어둠 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림자 서넛이 소리 없이 나타나 쓰러진 자들을 결박하기 시작했다. "장부는 확인하셨습니까?" "그래. 예상대로군. 서주 쪽 상단이 뒤에 있었어." 정명석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서주라면··· 영운문 산하 거성 중 하나와 가까운 곳입니다." 정헌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영운문이라.' 그 이름이 정명석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그는 묘한 무게감을 느꼈다. 삼천 년을 이어온 거대한 문파, 삼 개의 신성과 열다섯 개의 거성, 백오십 개의 상규성을 다스린다는 존재. 그 그늘 아래 자신이 딛고 선 정가라는 땅이 얼마나 작은지, 정헌은 알고 있었다. 정가는 그저 상규성 언저리에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는 소가문에 불과했다. "확실한 건가." "인장을 확인했습니다. 서주 상단의 것이 맞습니다. 다만 그 상단이 영운문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지는 아직···" "계속 조사해. 서주 상단이 왜 우리 장부를 노렸는지, 그 뒤에 누가 있는지." "예." 정명석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부하들은 이미 쓰러진 자들을 창고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고, 그들의 신음 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흐릿하게 퍼졌다. 정헌은 홀로 남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 하나 없는 밤이었다. 구름이 두껍게 하늘을 덮어 달마저 희미했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나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믿어선 안 된다.' 그는 그 다짐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며 저택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마다 흙먼지가 조용히 가라앉았고, 그의 뒷모습은 이내 안개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그러나 그가 떠난 창고 뒤편, 또 다른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지붕 위에서 모든 걸 지켜본 자였다. 그는 어둠 속에 완전히 몸을 숨긴 채,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정헌의 일거수일투족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림자는 정헌이 사내의 손목을 꺾는 순간에도, 세 명을 동시에 상대하며 삼각의 협공을 흘려내는 순간에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광경을 보면 볼수록 그의 눈빛은 점점 더 깊어졌다. 그는 정헌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다가, 이윽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 나이에··· 저 힘이라니." 그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동시에 묘한 흥미가 섞여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무언가를 마침내 발견한 자의 목소리였다. "게다가 저 문양은···" 그림자는 말끝을 흐리며 잠시 침묵했다. 청동정의 문양, 달빛 아래 얼핏 드러났던 그 형상을 떠올리는 듯 그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작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는 소리 없이 몸을 돌려 반대편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옅은 밤바람만이 남아 나뭇가지를 흔들 뿐이었다. 폐창고 위로 안개는 여전히 짙게 깔려 있었고, 그 안개 속 어딘가에서 정가의 작은 소요는 이제 막 더 큰 그림자의 시선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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