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인천하의 절대치유사

1화

눈을 뜨면 늘 낯설었다. 천장의 무늬도, 창밖으로 스미는 햇빛의 각도도 십팔 년째 똑같은데 나는 아직도 이 방이 내 방이라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전생, 이라는 말을 누가 믿을까. 나는 믿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서른두 살 회사원으로 죽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데, 눈을 뜨니 이 몸이었다. 열여덟 이도현. 남자. 그리고 이 세계에서 남자라는 건, 원래 세계의 여자보다도 못한 위치였다. 처음 눈을 떴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손을 들어 올렸는데, 손가락이 낯설었다. 마디가 가늘고, 손톱 밑에 때 하나 없는 손. 서른두 해 동안 마우스를 잡느라 굳은살이 박였던 손이 아니었다. 거울을 봤을 때 나는 소리도 못 지르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뒤로 며칠은 정신이 나간 채로 지냈다. 밥을 먹어도 무슨 맛인지 몰랐고, 학교에 가서도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러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이 세계의 법칙을 깨달았다. 여자가 위였다. 남자가 아래였다. 원래 세계와 정확히 반대였다. "도현아, 밥 다 됐어." 부엌에서 누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몸이 무거웠다. 어제 체육 시간에 여자애들 짐을 나르다가 삐끗한 발목이 아직도 욱신거렸다. 이 세계에서 체육 시간에 남자애들이 하는 일은 딱 하나였다. 짐 나르기. 힘든 일 도맡기. 여자애들이 운동하는 동안 물병 채워주고 수건 접어주는 것. 처음엔 적응이 안 됐다. 지금도 사실 안 된다. 발목을 만지작거리며 걸어 나가는데 벽에 걸린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빨간 동그라미가 쳐진 날짜가 하나 있었다. 다음 주 국초국 정기검사일이었다. 그 동그라미를 볼 때마다 속이 답답해졌다. 식탁에 앉으니 서린 누나가 국을 떠주고 있었다. 키 백팔십이 센티미터. 은회색 눈. 허리까지 오는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은 모습이 아침 햇살 아래서 유독 또렷했다. 누나는 국가초능력관리국, 줄여서 국초국 소속 요원이었다. 기공무라는 능력을 쓴다고 했다. 정확히 뭘 하는 능력인지는 나도 잘 몰랐다. 누나가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오늘도 야근이야?" 내가 물었다. "응. 임무가 있어서." 누나는 짧게 대답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 시선 회피가 마음에 걸렸다. 뭔가를 숨기고 있을 때 누나는 늘 저랬다. 숟가락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봤다. 나는 못 본 척 국그릇을 끌어당겼다. 부모님은 내가 이 세계에 눈을 뜨기 전, 그러니까 진짜 이도현이 태어나고 얼마 안 됐을 때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뒤로 누나가 나를 키우다시피 했다. 국초국에 들어간 것도 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고, 언젠가 취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저릿했다. 원래 세계에서 나는 형제가 없었다. 외동으로 자라서 명절마다 부모님과 셋이 앉아 밥을 먹었다. 그런데 이 몸에는 누나가 있었고, 그 누나는 나를 위해 모든 걸 걸고 있었다. 그게 고마우면서도, 동시에 이상한 감정이 자꾸 섞여 들었다. 존경도 아니고, 감사도 아니고. 뭐라고 이름 붙이면 안 될 것 같은 감정. 밥을 먹는 내내 나는 누나의 손목에 감긴 검은 밴드를 힐끔거렸다. 저건 뭐냐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누나는 웃으며 그냥 액세서리라고만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더 캐묻지도 않았다. "학교 다녀올게." 나는 서둘러 그릇을 비우고 가방을 멨다. "조심해." 누나가 등 뒤에서 말했다.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 있었다. 남자애들은 학교 밖에서도 안에서도 위험했다. 이 세계에서 남자는 약했고, 약한 존재는 늘 표적이 됐다.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시선이 몰렸다. 남자애가 혼자 걸어 다니면 늘 저런 눈빛을 받았다. 사냥감을 보는 눈빛. 나는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원래 세계의 기억이 있어서였을까. 나는 이 시선들을 받아들이기가 죽어도 힘들었다. 원래 나는 회사에서 팀장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회의실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후배들 결재를 도장 찍어주던 사람이었다. 누구 앞에서도 고개 숙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매일 고개를 숙였다. 복도를 걷는데 앞에서 걸어오던 남자애 하나가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갔다. 사과도 없었다. 그 애도 어차피 나와 같은 처지였다. 서로 밀치고 밀리는 게 익숙한, 아래 취급받는 존재들끼리의 무언의 규칙 같은 것. 교실에 들어서자 반장 여자애가 나를 불렀다. "야, 이도현. 이거 커피 좀 타 와." 동전 몇 개가 책상 위로 던져졌다. 짤그랑, 소리가 났다. 나는 그 동전을 내려다봤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미 알고 있었다. 지난달 다른 남자애가 반박했다가 어떻게 됐는지 봤으니까. 그 애는 일주일 넘게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소문에는 여자애들 여럿한테 둘러싸여 맞았다고 했다. "네." 짧게 대답하고 동전을 주웠다. 매점으로 걸어가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이 세계에 온 지 십팔 년. 나는 아직도 이 삶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원래 세계의 기억이 자꾸 발목을 잡았다. 자존심이, 존엄이,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무너지는 걸 견디기 힘들었다. 자판기 앞에 서서 동전을 넣는데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커피가 종이컵에 채워지는 동안 나는 자판기 옆면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 낯선 얼굴. 열여덟 이도현의 얼굴. 서른두 살 어른의 눈빛을 한 채로.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몸에는 능력이 하나 있었다. 절대치유. 어떤 상처든, 어떤 병이든 낫게 하는 힘. 국초국 정기검사에서도 확인된 능력이었다. 다만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써본 적이 없었다. 쓸 일이 없었으니까. 남자는 능력이 있어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능력을 드러내는 순간 국초국에 등록당하고, 그 순간부터 자유는 없어졌다. 도구로 취급받으니까. 누나가 신신당부했다. 능력은 절대 드러내지 말라고. 그 말을 할 때 누나의 은회색 눈이 유독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게 기억났다. 마치 뭔가를 겪어본 사람의 눈빛 같았다. 나는 커피를 타서 반장 여자애 책상에 올려놓았다. "고마워." 건성으로 대답하는 목소리에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골목 어귀에서 서린 누나와 마주쳤다. 검은 정장 차림에 어깨에 뭔가를 걸쳐 멘 모습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정장 안쪽으로 뭔가 딱딱한 것이 튀어나온 윤곽이 보였다. 무기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누나, 지금 나가는 거야?" "응. 급한 임무가 생겼어." 누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딱딱했다. 입술을 살짝 깨무는 버릇이 나올 때는 늘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오늘 무슨 일 있어?" "별거 아니야." "누나, 아까부터 표정이 좀 이상해." "신경 쓰지 마. 진짜 별거 아니니까." 목소리 끝이 살짝 흔들렸다.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지만, 캐물어봤자 소용없다는 것도 알았다. 누나는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 손길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오래,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나는 멀어지는 누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검은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은회색 눈이 어둠 속에서도 빛났다. 몇 걸음 걷던 누나가 문득 멈춰서더니 돌아봤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도현아." "응?" "아니야. 아무것도." 누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이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순간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뭔가 잘못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불안. 나는 그 불안을 애써 밀어냈다. 저녁을 혼자 차려 먹고,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숙제를 하는 척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계 바늘이 자정을 넘어갈 때까지 나는 현관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날 밤, 누나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새벽 세 시가 넘도록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휴대폰만 들여다봤다. 누나의 번호로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는 계속 가는데 받지 않았다. 창밖은 캄캄했다. 가로등 불빛 하나가 골목을 비추고 있었는데, 그 아래로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까 골목에서 누나가 하려다 삼킨 말이 무엇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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