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인천하의 절대치유사

2화

현관문 소리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골목에서 누나가 삼킨 말이 무엇이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그날 저녁, 누나는 검은 정장 위에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현관을 나서기 전 나를 한 번 돌아봤었다. "도현아." "응." "오늘은 문 잠그고 있어. 누가 와도 열어주지 말고." 평소와 다른 말투였다.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는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다녀올게." 아니, 그게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누나는 "다녀올게"를 말하려던 게 아니었다. 그 앞에서 무언가를 삼켰다. 짧은 침묵, 입술이 달싹이다 멈추는 순간이 분명 있었다. 어쩌면 못 돌아올 수도 있다는 말. 그 말을 삼키고 대신 평범한 인사를 골랐던 거다. 나를 안심시키려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나는 방바닥에 앉은 채로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신호는 계속 갔지만 받지 않았다. 통화 목록에는 이미 내가 건 전화가 열두 통이나 쌓여 있었다. 문자도 세 번 보냈다. 읽지 않음 표시가 그대로였다. 시계는 새벽 세 시 사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창밖에서 이따금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현관 쪽을 바라봤다. 서른두 살까지 살아본 기억이 있는데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경험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회사에서 밤새 야근을 하며 기다리던 결재 메일도, 부모님 병원비 걱정으로 뜬눈으로 지새우던 밤도, 지금 이 초조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누나가 잘못되면. 그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이 집에 나 혼자 남는다는 상상은 해본 적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해본 적이 있었다. 전생에서. 부모님을 사고로 잃고 혼자 남았을 때. 그 기억이 지금 이 순간과 겹쳐지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덜컹.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튕기듯 일어났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가 곧바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누나였다. 정장 재킷은 한쪽 어깨가 찢어져 있었고, 옆구리를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것이 배어 나왔다.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벽을 짚지 않으면 서 있기도 힘든 사람처럼, 반쯤 몸을 기울인 채 걸어 들어왔다. "누나!" 나는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다. "괜찮아." 누나가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닌 사람이 벽을 짚고 걸어오지는 않는다. 별거 아닌 사람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배어 나오지도 않는다. 나는 다가가서 누나의 팔을 잡았다. 옆구리에 닿은 순간이었다.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뭔가 이상한 열기가 손끝에서부터 퍼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내 손을 통과해서 누나의 상처로 흘러 들어가는 것 같았다. 뜨겁고, 저릿하고, 동시에 어딘가로 빨려나가는 느낌.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누나가 숨을 삼켰다. "...도현아." 목소리가 떨렸다. 방금 전까지 침착하려 애쓰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달랐다. 누나는 내 손을 확 뿌리쳤다. 뒤로 한 발 물러서며 옆구리를 다시 눌렀다. 은회색 눈이 놀란 듯 크게 뜨여 있었다. "왜 그래?" 내가 물었다. 손바닥에 남은 열기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누나가 고개를 저었다. 시선이 방바닥을 향한 채 나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씻고 잘 거야. 먼저 자." "누나, 옆구리 그거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응급실이라도—" "됐어." 누나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잘랐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넘어진 거야." 넘어져서 옆구리가 저렇게 찢어질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누나의 표정에 서린 뭔가가 나를 멈춰 세웠다. 두려움 같기도, 경계 같기도 한 눈빛이었다. 나를 향한 게 아니라, 방금 일어난 일 자체를 향한 두려움처럼 보였다. 누나는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나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손바닥을 펼쳐 봤다. 아무 흔적도 없었다. 붉은 자국도, 화상 자국도, 아무것도. 그저 뜨거웠던 감각만 남아 있었다. 손금 사이사이로 아직도 미열이 도는 것 같았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안에서 누나가 옷을 벗는 소리, 물이 쏟아지는 소리, 그리고 아주 짧게, 신음처럼 들리는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노크를 하려다가 손을 거뒀다. 서른두 살 팀장으로 살았던 기억 속에서도, 이런 건 처음이었다. 사람의 몸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 뭔가가 흘러 들어가는 감각. 그게 상처를 치료하는 힘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였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누나는 그 순간 분명히 뭔가를 느꼈다. 그리고 그걸 나에게 숨기려 하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학교 게시판에는 붉은 글씨로 공지가 붙어 있었다. [국초국 정기검사 - 3일 후 시행. 전교생 필수 참여] 나는 그 글씨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주변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지나갔다. 누군가는 기대에 찬 목소리로 "이번엔 등급 오르면 좋겠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한숨을 쉬며 "또 그거냐"고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젯밤 그 열기. 그게 뭐였든, 만약 그게 능력이라면. 국초국에 등록되는 순간 나는 도구가 된다. 국가가 관리하는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고, 그날부터 자유는 사라진다. 등급이 매겨지고, 필요에 따라 배치되고, 평생 저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 전생에서 뉴스로만 접했던 그 시스템이 이제 내 삶 안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검사를 피할 방법은 없었다. 전교생 필수 참여라는 문구가 그걸 못박고 있었다. "야, 이도현." 반장이었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항상 명령조가 섞여 있었다. 게시판 앞에 몰려 있던 아이들 사이를 헤치고 다가온 반장은, 언제나처럼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교무실 가서 정수기 물통 좀 바꿔." 반장이 손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너 담당이잖아." 예전 같으면 아무 말 없이 몸을 움직였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고, 물통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렸을 것이다. 그게 익숙한 순응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어젯밤의 그 열기가, 그리고 게시판의 붉은 글씨가 내 안의 뭔가를 건드려 놓은 것 같았다. "오늘은 제 담당 아닌데요."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당번표에 김민준이라고 되어 있어요." 반장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예상 못 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주변에 있던 몇몇 아이들이 흘끗 이쪽을 쳐다봤다. 반장은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뭔가 트집을 잡으려는 듯 입을 열었다. "당번표가 뭐 그렇게 중요해? 그냥 하라면 좀—" "당번표대로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요."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서른두 살의 눈으로, 열여덟 살의 얼굴을 하고. "다른 사람한테 미루는 게 이상한 거죠."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반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이런 식으로 되받아치는 아이가 드물었을 것이다. 특히 나처럼, 지금까지 한 번도 반항한 적 없던 아이가. "...됐어. 신경질적이긴." 반장이 자리를 떴다. 뒷모습에 짜증이 묻어났지만, 더 이상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별거 아닌 승리였지만, 오랜만에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교실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아이들 몇 명이 나를 다시 쳐다봤다. 평소와 다른 눈빛으로. 수업 시간 내내 나는 창밖을 보며 딴생각을 했다. 국초국 검사, 어젯밤의 열기, 누나의 떨리던 눈빛. 세 가지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만약 내가 뭔가를 가지고 있다면, 그걸 숨길 방법이 있을지. 만약 누나도 뭔가를 가지고 있다면, 그건 대체 무엇인지. *** 하굣길, 나는 늘 다니던 지름길 골목으로 들어섰다. 해는 이미 저물어 하늘이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가로등 하나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골목 특유의 눅눅한 냄새와,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평소라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을 골목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상하게 신경이 곤두섰다. 그리고 그 가로등 아래, 벽에 기대앉은 사람이 보였다. 검은 단발머리.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옷 사이로 붉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 처음에는 술에 취해 쓰러진 사람인가 싶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숨이 얕았다. 가슴이 크게 오르내리지 않았다. 팔 한쪽은 부자연스럽게 꺾여 있었고, 몸 여기저기 찢어진 상처가 보였다. 죽은 건가. 나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 다가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신고를 해야 하나, 아니면 가까이 가서 확인을 해야 하나. 머릿속이 뒤엉켰다. 그 순간 그녀의 눈이 반쯤 떠졌다. 핏발 선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