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서연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조혜진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규칙적이고 절제된 걸음. 그 발소리의 리듬만으로도 서연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지우가 재빨리 서연의 손을 놓고 뒤로 한 발 물러섰다.
— 저쪽으로.
지우가 낮게 속삭이며 건물 그늘 쪽을 가리켰다.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그 차분함이 서연을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벽에 몸을 붙였다. 벽의 냉기가 등을 타고 스며들었다. 콘크리트 특유의 습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심장 박동이 귓가에서 울렸다.
쿵, 쿵, 쿵. 자신의 것인지 지우의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어깨가 맞닿아 있었다. 그 접촉만이 지금 이 순간 서연을 붙잡아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조혜진의 발소리가 바로 앞을 지나쳤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가는 듯했다. 서연은 숨을 참았다. 흐읍— 숨을 삼키는 소리마저 새어 나갈까 두려워, 서연은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몇 초가 몇 분처럼 느껴졌다.
그림자가 벽을 가로질러 길게 늘어졌다가, 서서히 짧아지며 사라졌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서연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지우가 서연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그 손의 온도가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 괜찮아?
— 응... 놀랐을 뿐이야.
지우는 서연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손바닥이 지나가는 궤적을 따라 서연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 손길에 담긴 것은 위로였지만, 동시에 두 사람이 처한 위험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숨어야 하는 걸까.’
서연은 속으로 되물었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매번 같은 질문이 목구멍에 걸렸다.
지우가 서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 눈빛만은 또렷했다.
— 오늘은 이만 들어가자. 다음엔 좀 더 조심해서 만나야 할 것 같아.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우가 손을 잡아 이끌고 함께 건물 뒤편에서 벗어났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지우는 주변을 살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 경계심이 오히려 서연에게는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함을 불러왔다.
‘나 때문에 저 애가 이렇게 예민해져야 하는구나.’
각자의 기숙사 방향으로 흩어지기 전, 지우가 다시 한번 서연의 손을 꽉 쥐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온기가 스며들었다.
— 연락할게. 잘 자.
— 응, 너도.
서연은 지우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지우의 뒷모습은 걸음마다 조금씩 작아졌고, 가로등 불빛 아래를 지날 때마다 그림자가 길어지다 짧아지길 반복했다. 그 뒷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기숙사 건물로 걸어가는 짧은 거리 동안, 서연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뒤엉켰다. 오늘 하루가 유독 길게 느껴졌다. 아침의 평범했던 시간, 오후의 조혜진과 나눈 대화, 그리고 방금 전의 위태로운 순간까지. 마치 며칠에 걸쳐 벌어진 일 같았다.
방으로 돌아온 서연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철컥, 문고리가 부드럽게 돌아갔다.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방 안은 어둡고 고요했다. 아름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침대 위 이불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서연은 그 옆을 지나 자신의 침대에 몸을 눕혔다.
매트리스가 낮게 삐걱거렸다. 서연은 숨을 죽이며 잠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름의 숨소리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욕실에서의 위기, 조혜진의 의심스러운 질문, 그리고 지우와의 짧은 만남. 모든 것이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앞으로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낫표 속 질문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여섯 해 동안 억눌러온 자신의 몸, 그리고 그 몸을 온전히 받아주는 유일한 사람. 두 가지 사실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상황이 서연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아슬아슬했다.
서연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 오늘 낮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조혜진의 눈빛. 날카롭고 집요했던 그 시선. 우연이라고 넘기고 싶었지만, 자꾸만 마음 한쪽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냥 예민한 성격일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자.’
스스로를 다독이는 말이었지만, 확신은 없었다.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지우의 메시지였다. ‘잘 도착했어. 오늘 진짜 고생했어. 사랑해.’
서연은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눈으로 훑었다. 화면의 옅은 불빛이 서연의 얼굴을 은은하게 밝혔다.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짧은 문장 몇 줄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온도가 방 안의 냉기를 조금 밀어내는 것 같았다.
답장을 보내려는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잠시 멈췄다. 뭐라고 써야 할지, 이 마음을 다 담을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사랑해.’
짧게 적어 보냈다. 전송 완료 표시가 뜨는 걸 확인한 뒤, 서연은 휴대폰을 가슴 위에 얹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때 방문 밖에서 낮은 발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그냥 지나가는 소리인가 싶었다. 그러나 이번엔 복도를 지나는 소리가 아니라, 412호 앞에서 멈추는 소리였다.
서연은 몸을 굳혔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잦아들었던 긴장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휴대폰 화면의 불빛을 서둘러 가렸다. 화면을 손바닥으로 덮은 채, 서연은 숨을 참았다.
문 앞에서 잠시 서성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발끝이 바닥을 살짝 끄는 소리, 그리고 잠깐의 정적. 누군가 문 너머에서 안쪽을 가늠하고 있는 듯한 침묵이었다.
그리고 낮게, 노크하듯 두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똑, 똑.
그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어두운 방 안에서는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서연의 온몸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름이 뒤척이며 낮게 잠꼬대를 흘렸다.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름의 몸이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다행히 깨어나지는 않은 듯했다.
서연은 이불 속에서 숨을 죽인 채 문 쪽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도 문틈 사이 그림자의 움직임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시계는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시간에 방문을 두드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서연이 아는 사람 중에는.
‘지우는 방금 헤어졌는데.’
‘아름이는 잠들어 있고.’
그렇다면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서연의 머릿속에 문득 조혜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낮에 마주쳤던 그 눈빛. 지나치게 집요했던 시선. 설마,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문고리가 아주 천천히,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