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역, 봄을 다시 살다

1화

눈을 감기 직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헤드라이트였다. 노랗다기보다 차라리 하얗게 느껴지던 그 빛. 그 빛이 시야 전체를 집어삼키던 순간까지도 나는 내가 죽는다는 걸 실감하지 못했다. 횡단보도를 반쯤 건넜을 때 신호가 바뀌었고, 나는 학원 가방을 고쳐 메며 뛰었을 뿐인데, 브레이크 밟는 소리보다 먼저 몸이 붕 떠올랐다는 걸 기억한다. 아프다는 감각도 사치였다. 몸이 허공에서 한 바퀴를 돌았던 것도 같고, 아스팔트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은데, 그게 내 몸에서 난 소리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시야가 새하얗게 번지고, 저 멀리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그게 엄마였는지 아빠였는지, 아니면 그저 환청이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김하늘. 열아홉, 고3, 야자를 째고 편의점에 삼각김밥을 사러 다녀오던 길이었다. 대단한 짓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배가 고파서, 딱 십 분만 나갔다 오려던 것뿐이었다. 그렇게 죽는구나, 어이없게.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완전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죽음이라는 게 이렇게 조용하고, 이렇게 따뜻한 것이었나. 통증도 없고, 무게도 없고, 심지어 시간이 흐른다는 감각조차 없었다. 마치 아주 오래된 이불 속에 몸을 파묻은 것처럼, 나는 그 어둠 속에서 편안했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직후였다. 성별도, 나이도, 심지어 사람의 것인지도 가늠할 수 없는 목소리가 내 이름 대신 이렇게 물었다. "돌아가고 싶으냐, 아니면 다시 시작하고 싶으냐." 무슨 말인지 되묻고 싶었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으로 생각만 흘려보냈을 뿐인데도 목소리는 정확히 알아들은 듯했다. 돌아간다는 게 무슨 뜻일까. 사고가 나기 전으로? 그럼 나는 그 순간을 다시 맞이해야 하는 걸까. 같은 도로, 같은 시간, 같은 헤드라이트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망설임 없이 답을 흘려보냈다. 돌아간다고 해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다시 시작하는 쪽을 택하겠다고. 그 순간 몸이 통째로 뒤집히는 듯한 감각과 함께, 나는 낯선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좁은 관을 통과하는 것처럼, 혹은 물속 깊이 가라앉았다가 단숨에 끌어올려지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손끝의 서늘함이었다. 실크 이불의 결이 손바닥에 닿는 느낌부터가 익숙하지 않았고, 천장을 올려다보니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다. 크리스털 조각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잘게 부서지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우리 집 반지하 자취방 천장에는 곰팡이 자국뿐이었는데. 곰팡이는커녕 얼룩 하나 없이 새하얀 천장이라니. 여기가 어디지? 몸을 일으키려는데 팔다리가 내 것 같지 않게 가늘고 길었다. 힘을 주는 방식조차 낯설어서, 이불을 걷어내는 것만으로도 몇 초가 걸렸다. 침대에서 내려서려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였고, 협탁을 짚어 겨우 몸을 지탱했다. 그 협탁 위에 놓인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새하얀 피부, 또렷한 이목구비, 유난히 붉은 입술. 흑단처럼 검은 머리칼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려 있었고, 눈매는 서늘했지만 그 안에 담긴 눈동자는 지금 내 것처럼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알다마다. 수백 번도 넘게 화면 속에서 봤던 얼굴이었으니까. 강서윤. 내가 죽기 전 마지막까지 읽고 있던 웹소설 『그녀의 이름은 사랑이 아니다』의 악역 히로인. 재벌가의 영애로 태어났으나 사실은 병원에서 뒤바뀐 아이였고, 진짜 상속녀가 나타나자 모든 걸 잃고 몰락해가던, 그러다 마지막화 즈음엔 약혼자의 친구들에게 끌려가 짓밟히는 결말을 맞았던, 그 강서윤. 나는 그 소설을 정주행하며 강서윤이 나올 때마다 손톱을 물어뜯었었다. 저러다 진짜 큰일 나겠다, 저 캐릭터 결말이 너무 잔인한 거 아니야, 하면서. 그게 다일까? 아니, 정확히는 그 강서윤의 몸에, 죽은 김하늘의 정신이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환생인지 빙의인지 이름 붙이기도 애매한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나는 오래 고민할 여유가 없다는 걸 곧 깨달았다. 왜냐하면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을 알고 있었으니까. 강서윤은 약혼자 강태민에게 버림받는다. 진짜 상속녀 강하율이 등장하면서다. 강하율이 나타나기 전까지 강서윤은 강 그룹의 하나뿐인 딸이었고, 강태민과는 어릴 때부터 정혼자로 지내온 사이였다. 그러나 강하율이 등장하고, DNA 검사 결과가 뒤집히고,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데는 채 몇 달이 걸리지 않았다. 신분을 되찾으려 발버둥 치다 실패하고, 가진 것도 없이 원한만 남은 강서윤은 강태민의 친구들이 벌인 술자리에 억지로 끌려갔다가, 그 자리에서 끔찍한 일을 당한다. 그리고 그 사건은 소설 속에서 그저 여주인공의 착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로 소비될 뿐, 강서윤이라는 인물에게는 아무런 구원도 주어지지 않았다. 작가는 그 인물을 그렇게 처리하고, 다음 화부터는 강하율과 강태민의 해피엔딩을 향해 순조롭게 나아갔었다. 소름이 돋았다. 내가 그 몸에 들어와 있다니. 이번 생은 절대로 그 결말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은 절대로 강태민 따위에게 목을 매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은 절대로 남이 써준 각본대로 살지 않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아가씨, 벌써 일어나셨어요?" 앞치마를 두른 중년 여자였다. 소박한 무명 옷에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그녀는, 놀란 낯빛으로 나를 살피며 다가왔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또 한 번 심장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이 사람도 알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강서윤의 친모이자, 강 그룹 저택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던 여자. 이름은 윤미경. 소설에서는 이 인물의 사연이 그다지 상세히 다뤄지지 않았다. 그저 뒤바뀐 아이의 진짜 어머니가 알고 보니 이 저택에서 오래 일해온 가사도우미였다는 사실이, 후반부에 가서야 곁가지 에피소드처럼 잠깐 언급될 뿐이었다. 어떤 사정으로 이 여자가 자기 친딸이 사는 저택에 들어와 일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는지는 작가도 궁금해하지 않은 듯했다.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그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이마에 손을 짚으려 하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손끝이 스치기도 전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 손짓에 서운함이 스쳤는지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애써 감추려는 듯 눈을 내리깔았지만, 그 짧은 순간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여자가 지금껏 얼마나 자주 이런 식으로 밀려났을지.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엄마. 소설 속에서 강서윤은 이 여자를 단 한 번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신분 세탁 후 가사도우미로 저택에 들어온 친모를 강서윤은 알아보지 못했고, 오히려 하대하며 함부로 대했었다. 차 심부름을 늦게 가져왔다고 컵을 던진 적도 있었고, 옷매무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앞에서 면박을 준 장면도 있었다. 그리고 훗날 진실이 밝혀졌을 때조차, 두 사람은 끝내 화해하지 못한 채 소설은 끝났다. 어머니는 조용히 저택을 떠났고, 강서윤은 자신이 짓밟은 사람이 친어머니였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곱씹을 겨를도 없이 몰락해버렸으니까. 그것이 궁금하겠지, 왜 이 여자가 자기 딸의 저택에서 하녀 노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아직 그 답을 알지 못했다. 소설에도 자세히 나오지 않았던 부분이니, 앞으로 내가 직접 알아내야 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번 생에서는, 적어도 이 여자에게만큼은 함부로 굴지 않을 것이라는 것. "괜찮아요." 겨우 그 한마디를 뱉어냈을 뿐인데, 윤미경의 눈가에 아주 잠깐 물기가 스치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얼른 눈을 깜빡이며 그 물기를 감췄고, 아무렇지 않은 척 이불을 정리하는 척 손을 놀렸다. 그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다는 걸, 나는 모른 척했다. "물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 "...네, 부탁드려요." 원래 강서윤이라면 이런 대답을 했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짧게 고갯짓 한 번으로 명령하듯 지시했겠지. 그런데 나는 자꾸만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습관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건가, 아니면 이 여자에게만큼은 그렇게 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앞선 건가. 윤미경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 여자를 지켜야 한다고.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그리고 그 순간, 방문 밖에서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서윤, 일어났으면 나와봐.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강태민이었다. 목소리만으로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소설 속에서 수백 번은 읽었던 그 이름, 그 목소리의 주인. 강서윤을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결국 그녀를 버렸던 남자. 지금 이 순간의 그는 아직 그 배신을 저지르기 전일 텐데도, 나는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 낮은 음성만으로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할 이야기라니. 지금, 이 시점에. 나는 아직 이 몸에 완전히 적응하지도 못했는데. 강서윤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이 저택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하나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문밖의 목소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겠다는 듯, 다시 한번 낮게 울렸다. "강서윤." 이름을 부르는 그 어조에 실린 것이 다정함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나는 아직 가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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