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역, 봄을 다시 살다

2화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명령하듯 툭 끊어지는 어조,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말투였다. "서윤아. 나와봐." 나는 침대 헤드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며 숨을 골랐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두려움과는 조금 다른, 기시감 같은 것이었다. 손끝이 저릿했고, 목 안쪽이 바짝 말라 있었다. 강태민.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원작의 문장들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그녀의 이름은 사랑이 아니다』 3권, 남주인공 강태민이 첫 등장하는 장면. 냉정한 눈빛과 낮은 목소리, 약혼녀를 짐짝처럼 대하는 태도까지. 나는 그 소설을 정주행으로 세 번, 발췌독으로는 셀 수 없이 읽었던 독자였다. 특히 이 장면, 첫 등장 장면은 유독 좋아해서 몇 번이고 다시 읽었었다. 그때는 그저 활자였다. 지금은 아니었다. 그가 어떤 인간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강 그룹 회장의 조카이자 지명 후계자. 강 회장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대신 일찍 죽은 동생의 외아들인 강태민을 데려와 그룹의 경영권을 물려줄 준비를 해왔다. 그리고 그 후계자 자리를 확실히 하기 위해 회장의 친딸과 정혼시킨다는 것이 이 집안의 오랜 계획이었다. 문제는 그 친딸이라는 게 나, 강서윤이 아니라 사실은 강하율이라는 점이었다. 신생아 때 병원에서 몰래 뒤바뀐 진짜 상속녀. 나는 그저 대타였고, 이제 곧 그 사실이 밝혀질 예정이었다. 그 결말에서 나는 어떻게 되었더라. 소설 속 강서윤은 정혼이 파기되고 신분이 발각된 후 완전히 몰락해, 강태민의 친구들에게 끌려가 짓밟히는 결말을 맞았다. 그 장면을 읽으며 나는 작가가 굳이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써야 했나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조연 하나 처리하는데 뭐 그렇게까지, 하고 댓글창에 불평을 남겼던 것도 같았다. 이제 그 결말의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무슨 소리지, 하고 처음엔 생각했다.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과 낯선 몸, 그리고 익숙한 소설 속 이름이 내 이름이 되어 있었을 때. 하지만 부정할 시간도 없이 사흘이 지나갔고, 나는 이제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서윤아. 안 들려?"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방문을 열었다. 복도 창으로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고, 그 빛 속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무표정한 얼굴에는 감정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짙은 눈썹 아래 눈동자가 나를 훑어보았는데, 그 시선에는 관심이라기보다는 점검에 가까운 차가움이 담겨 있었다. 책 속에서 묘사되던 그대로였다. 아니, 활자보다 더 서늘했다. 종이 위의 문장은 아무리 냉정해도 온도가 없었지만, 지금 눈앞의 이 사람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공기를 한 뼘쯤 낮추는 느낌이었다. "얼굴이 왜 그래." 그가 물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지적이었다. "어디가요?"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되물었다. "핏기가 없어." 그는 팔짱을 낀 채 나를 위아래로 살폈다. "어제까지 멀쩡했잖아." 어제의 강서윤을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몸의 기억은 내게 없었으니까. 다만 원작 속에서 강서윤이 강태민을 볼 때마다 질투와 애착이 뒤섞인 눈빛을 했다는 묘사만은 또렷이 기억났다. 나는 지금 그 눈빛을 흉내 내야 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할지 잠시 갈등했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그의 셔츠 깃 언저리쯤을 바라보며 시간을 벌었다. 결론은 빨리 났다. 이번 생은 절대로 그 결말을 재현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은 절대로 이 남자에게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은 절대로 질투와 애착으로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은 절대로 짓밟히는 쪽으로 살지 않을 것이다. "몸이 좀 안 좋았어요." 나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감정을 숨기는 데는 이 표정이 가장 안전했다. "그래?" 그의 목소리에는 별다른 걱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날씨를 확인하듯 무심한 억양이었다. "오늘 저녁 회장님 댁 저녁 식사, 잊지 않았지." "기억하고 있어요." 사실은 방금 알았다. "7시야." 그가 덧붙였다. "늦지 마." "네." 그는 더 말을 섞지 않고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멀어졌다. 뒷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 남자가 나를 걱정해서 찾아온 게 아니라는 것쯴. 오늘 저녁 식사를 확인하려고 온 것뿐이었다는 것쯴. 정략의 부품으로서 나의 존재를 점검하러 온 것이었다는 것쯴. 걔? 망설임이 없어? 정말로, 단 한 톨의 망설임도 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그 등을 보며 나는 실소가 나올 뻔했다. 원작에서 읽을 땐 그 무심함이 매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겪으니 매력은커녕 소름이 먼저 돋았다. 서늘하게 배 속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 방으로 돌아오니 윤미경이 물잔을 들고 서 있었다.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잔을 협탁에 내려놓는 그녀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 떨림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마디가 굵고 거친 손이었다. 이 집에서 오래 몸을 쓴 사람의 손. "아까 그… 강태민 도련님이셨죠." 그녀가 낮게 물었다. "네." "괜찮으세요? 표정이…" 말끝을 흐리며 그녀는 내 얼굴을 살폈다. 그 시선에는 걱정이 배어 있었는데, 단순한 고용인의 걱정이라기엔 지나치게 깊었다. 눈매가 조금씩 젖어드는 것 같기도 했다. 원작에서 윤미경이라는 이름은 딱 두 번 등장했다. 강서윤의 방을 청소하는 가사도우미, 그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녀가 강서윤의 친모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신생아 때 병약한 자기 딸을 몰래 부유한 집안의 딸과 바꿔치기한 여자. 그리고 그 딸의 곁을 떠나지 못해 가사도우미로 남은 여자. 매일 이 방에 물을 가져다주고, 이불을 정리하고, 먼발치에서 딸의 안색을 살피는 것으로 십수 년을 버텨온 여자. 이 사람이 나를 얼마나 오래 지켜봐 왔을까. 원작 속 강서윤은 이 여자를 그저 방 청소하는 아줌마 정도로 취급했을 것이다.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준 적 없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가슴 어딘가가 뻐근했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이 몸의 지난 세월이 만들어놓은 빚처럼 느껴졌다. "저는 괜찮아요." 나는 그녀를 향해 처음으로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런데…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윤미경입니다, 아가씨." "윤미경 씨." 나는 그 이름을 입에 담아보았다. 낯설고도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었다. 혀끝에 오래 얹어두었던 것처럼. "고마워요. 물, 매번 이렇게 가져다주셔서." 그녀는 순간 말을 잃은 듯 나를 바라보았다. 잔을 쥔 손이 허공에서 잠깐 멈췄다. 어쩌면 원래의 강서윤은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 한 번 해본 적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그 짐작이 맞았는지, 윤미경의 눈가가 붉어졌다가 이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래도요." "아가씨가… 오늘따라 좀 이상하시네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웃는 얼굴이 낯설어 보일 만큼 오래 굳어 있던 표정이었다. "이상해요?" "평소랑은 좀…" 말을 삼키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좋아서요." 짧은 대화였지만 그녀가 방을 나서는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진 것을 나는 느꼈다. 소소한 시작이었다. 억울하게 산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지금부터라도 이 사람의 편이 되어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타협점이 아니라 진심으로. * 창밖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저녁 식사까지 남은 시간을 셈해보며 나는 이 집안의 구조를 다시 정리했다. 강 회장의 조카인 강태민, 그의 정혼자인 강서윤, 곧 등장할 진짜 상속녀 강하율, 그리고 이 모든 걸 지켜보며 판을 짜는 늙은 집사 박용현까지. 원작의 인물들이 하나둘 머릿속에서 자리를 잡았다. 오늘 저녁, 강하율이 처음으로 이 집에 발을 들일 예정이었다. 원작 3권의 시작이었다. 나는 그 장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강태민이 강하율을 처음 보고 첫눈에 마음이 흔들리는 장면. 그리고 강서윤이 그 옆에서 초조하게 질투를 삼키던 장면. 그 장면의 다음, 그다음, 그리고 몇 권 뒤의 파국까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나는 옷장 문을 열며 다짐했다. 질투하지 않을 것이다.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저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살아남을 방법을 찾을 것이다. 옷장 안에는 강서윤의 옷들이 색깔별로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값비싼 원단, 흠 없는 재봉선. 이 모든 것이 언젠가 하율의 것이 되고, 나는 빈손으로 이 집을 나가게 될 것이다. 원작이 그렇게 정해두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원작이 아니다. 적어도 이제부터는. 거울 속 낯선 얼굴이, 낯설지만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 뒤로, 창밖 하늘이 붉게 물들며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계는 어느새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 시간 뒤, 나는 이 집안의 진짜 주인이 될 여자와 처음으로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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