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가족 회의는 응접실에서 열렸다. 강 회장이 상석에 앉고, 강태민이 그 옆에, 강하율이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고, 박용현은 서류철을 든 채 문가에 서 있었다.
샹들리에 불빛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던 밤이었다. 창밖에서는 초겨울 바람이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고, 그 소리마저 이 자리의 긴장을 더 무겁게 만드는 듯했다. 벽난로에서 장작 타는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지만, 그 온기조차 이 응접실의 냉랭함을 데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손끝으로 소파 팔걸이의 결을 문지르며 숨을 골랐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이 순간을 얼마나 오래 기다려왔던가.
전생에서 나는 이 순간을 견디지 못했다. 진실이 밝혀지던 그날, 나는 무너졌고 애원했고 억울함에 목이 쉬도록 울었다. 그리고 그 눈물은 결국 강하율의 온화함을 더 빛나게 만드는 배경이 되었을 뿐이었다. 이번 생은 절대로 그렇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은 절대로 애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은 절대로 그들이 기대하는 그림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결과가 나왔다." 강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박 집사, 말씀드리게."
박용현이 서류철을 열며 헛기침을 했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랜 세월 이 집의 온갖 일들을 처리해온 그였지만, 이런 종류의 발표는 익숙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검사 결과, 서윤 아가씨는 회장님의 친딸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반면 하율 아가씨는 회장님과 친자 관계가 확실합니다."
응접실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강태민의 눈이 나를 향했고, 그 시선 속에는 당혹감과 계산이 뒤섞여 있었다. 강하율은 입을 가리며 놀란 척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그 눈물이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된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동요 없이 자리를 지켰다. 그녀의 손끝이 떨리는 타이밍, 목소리가 갈라지는 지점, 눈물이 맺히는 각도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연출된 무대였다.
"그럼 그동안 저는..." 강하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제가 진짜..."
"그렇다." 강 회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내 친딸이다."
강하율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고개를 숙였고, 그 모습은 마치 예술 작품처럼 완성도가 높았다. 저 눈물의 각도, 저 어깨의 떨림까지 계산된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이 방에서 나 하나뿐일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모였다. 이 순간을 얼마나 여러 번 상상했던가.
놀란 척 부인해야 할까, 아니면 무너지듯 눈물을 흘려야 할까.
강태민의 표정에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듯한 여유가 서려 있었다. 저 여자가 이제 곧 무너지겠지. 애원하겠지. 그러다 결국 이 집에서 쫓겨나겠지.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느 쪽도 택하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강 회장을 마주 보았다. 등을 곧게 펴고,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담담히 말했다.
응접실에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정적이었다. 무언가 예상을 벗어난 답변에 다들 잠시 말을 잃은 듯했다.
"뭐라고?" 강태민이 먼저 반응했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나를 노려보았다. "알고 있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입니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도록 신경 썼다. "얼마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윤미경 씨와 저의 외모가 이상하리만치 닮았다는 걸 알아챈 후로요."
사실 그것만으로 확신한 것은 아니었다.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면 나 역시 그 우연의 일치를 그저 흘려보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사정까지 이 자리에서 밝힐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왜 말하지 않았지?" 강 회장이 처음으로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그 눈빛은 날카로웠지만, 그 안에는 미세한 흔들림도 섞여 있었다.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는 그의 습관이 오늘따라 유독 눈에 띄었다.
"확신이 없었으니까요."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만약 사실이라 해도, 제가 먼저 나서서 소란을 만들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테니까요."
이 대답은 절반은 진실이고 절반은 거짓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굳이 먼저 밝힐 이유가 없었을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미리 알고도 침묵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내가 이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
두려워하지 않는 자.
그것이 지금 내가 이 방 안에서 심어야 할 유일한 인상이었다.
강 회장은 한참 나를 바라보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창밖으로 향했다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그래서, 지금 네 심정은 어떤가."
예상보다 부드러운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이 상황을 내게 유리하게 이끌 수 있을까. 짧은 순간, 머릿속으로 몇 가지 선택지가 스쳐 지나갔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안도감이 듭니다."
"안도감?" 강태민이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동안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늘 어딘가 불편했습니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 말에 강 회장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고, 대신 박용현을 향해 손짓했다.
"윤미경을 불러오게."
박용현이 고개를 숙이고 응접실을 나섰다. 그가 나가는 동안 문이 열리며 잠시 복도의 찬 공기가 스며들었고, 그 냉기가 방 안의 긴장을 한층 더 조여왔다.
그 짧은 순간, 나는 강하율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는 척하면서도, 그 눈은 나를 향해 있었고, 그 안에는 불안이 스며 있었다.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군.
그녀는 아마 내가 무너지고, 애원하고, 억울함을 토로하며 이 자리를 아수라장으로 만들 거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그 대비되는 자리에서 온화하고 관대한 모습으로 빛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 무대를 내주지 않았다.
무대를 내주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타격이었다. 그녀가 준비한 각본이 통하지 않을 때, 그녀는 다음 수를 준비하지 못한 채 흔들릴 수밖에 없다.
잠시 후, 박용현이 윤미경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녀는 앞치마도 벗지 못한 채였고, 마디 굵은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었다. 오랜 세월 부엌일을 해온 손이었다.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발견한 그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강 회장이 그녀를 향해 서류철을 던지듯 내밀었다. "이게 뭔지 알겠나."
윤미경은 서류를 받아 들지도 못한 채, 그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멀리서도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말해보게." 강 회장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자네가 그때, 아이들을 바꾼 건가."
응접실 안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벽난로의 장작이 타닥, 소리를 내며 튀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