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며칠이 지나자 소연은 이 집의 흐름에 조금씩 익숙해졌는데, 아침이면 어김없이 붓을 들어 검은 먹물로 그날의 일정을 적어두는 한서령의 버릇이나, 차를 마실 때 항상 왼손으로 잔을 쥐고 오른손은 무심하게 소맷자락 속에 넣어두는 습관 같은 것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특이한 버릇이라 여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소한 동작들이 한서령이라는 사람을 이루는 결이라는 걸 소연은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해동의 다른 귀족들과 달리, 한서령은 남성용 도포를 즐겨 입고 머리를 짧게 정돈했는데, 그 모습을 처음 본 이웃 상인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한참을 쳐다보았을 때도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마치 그런 시선쯤은 이미 수십 번, 수백 번 겪어온 것처럼 태연한 얼굴이었다. 소연은 그 뒷모습을 보며, 저 사람은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저런 눈빛들을 받아왔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가, 이내 자신이 할 일이 아니라는 듣 고개를 저었다.
"저, 저 어르신은 왜 늘 사내 옷을 입으십니까." 어느 날 저녁, 소연이 밥상을 치우며 조심스레 묻자, 한서령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편이 움직이기 편하니까. 그게 다야."
짧고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소연은 그 안에 담긴 완고함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더 캐물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기에, 소연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상을 들고 물러났는데,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이 어쩐지 오래도록 자신을 따라오는 것 같아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 * *
하루는 시장에서 심부름을 다녀오던 길에, 좌판 앞에서 한 상인이 손님의 지갑이 사라졌다며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내 지갑! 방금까지 여기 있던 내 지갑이 어디 갔단 말이오!" 상인의 목소리가 시전 골목을 쩌렁쩌렁 울렸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저마다 의심스러운 이를 손가락질하며 웅성거렸다. 누군가는 옆 좌판의 늙은 행상을, 누군가는 지나가던 나그네를 지목했고, 그 소란 속에서 한 아이가 벌벌 떨며 구석에 몰려 있었다.
소연은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아이의 소매 끝에 시선이 멈췄다. 물기가 배어 있었는데, 그 각도가 이상했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저 아이의 소매가 젖어 있는데, 방금 물동이를 지나쳤을 리 없는 각도로 얼룩이 졌습니다. 지갑을 숨기려 소매 안쪽으로 밀어 넣다가, 옆에 쌓아둔 젖은 천에 스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놀라 소연을 돌아보았고, 몇몇은 "저 낭자가 뭘 안다고" 하며 눈을 흘겼지만, 결국 지목당한 아이는 벌벌 떨며 소매 안에서 지갑을 꺼내 놓았다. 지갑이 바닥에 툭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상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지갑을 주워 들었다.
그 소식이 저택까지 흘러들어오자, 한서령은 저녁상을 물리며 담담히 물었다.
"그건 어떻게 알아챈 거지."
"그, 그냥…… 눈에 보였을 뿐입니다." 소연은 겸손하게 대답했지만, 한서령의 초록빛 눈동자에는 순간 흥미로운 빛이 스쳤다. 마치 오래도록 찾아온 물건을 뜻밖의 곳에서 발견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냥 보였다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한서령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소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그 시선이 오래 머무는 것을 느낀 소연은 괜히 귀 끝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그 열기가 목덜미까지 슬며시 번져갔지만, 소연은 그것을 부끄러움이라 부르지 않고 그저 날씨 탓이라 여기며 애써 외면했다. 오늘따라 방 안이 좀 덥군,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부채를 찾는 척 손을 움직였지만, 사실 부채는 저만치 방구석에 놓여 있었다.
이후로 한서령은 소연에게 종종 사소한 사건들을 슬쩍 흘려주었는데, 이웃집 닭이 사라진 일이나, 시전 상인의 저울이 미묘하게 어긋난 일, 심지어는 옆집 며느리가 시어머니 몰래 곶감을 훔쳐 먹었다는 소문의 진위를 가려내는 일까지, 크고 작은 문제들이 소연의 손을 거쳐 갔다. 소연은 그런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내면서, 자신이 이 집에서 조금씩 필요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꼈고, 동시에 그 사실이 스스로도 신기해 몇 번이나 마당 한구석에서 혼자 실없이 웃곤 했다. '내가 이런 일에 재주가 있을 줄이야.' 어릴 적 마을에서는 그저 눈치가 빠르다는 말을 들었을 뿐인데, 이곳에서는 그것이 제법 값이 나가는 능력처럼 여겨지는 게 낯설면서도 은근히 기뻤다.
그러던 어느 저녁, 마당의 비둘기가 다리를 절며 절뚝거리는 것을 발견한 소연이 쪼그려 앉아 그 발을 살펴보다가, 작은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보이는 가시를 조심스레 뽑아주었다. 비둘기는 처음엔 놀라 파닥거렸지만, 이내 얌전히 소연의 손안에 몸을 맡겼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서령이 언제 다가왔는지 뒤에서 조용히 물었다.
"새를 그렇게 다룰 줄 아는가."
"어릴 적에 마을에서 새를 많이 돌봤습니다. 이 아이는,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아 보입니다." 소연이 대답하며 웃어 보이자, 한서령은 처음으로 입가에 아주 희미한 곡선을 그리며 대꾸했다.
"그래도 손이 굼뜬 것치고는, 나쁘지 않군."
그 말이 첫날의 냉랭한 평가와는 사뭇 다르게 들려서, 소연은 가슴 한구석이 이상하게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두워지는 마당에 저녁 바람이 불어와 비둘기의 깃털을 살짝 흔들었고, 한서령의 짧게 정돈된 머리카락도 함께 흔들렸는데, 그 옆얼굴이 마치 세필로 정교하게 그려낸 그림처럼 고요하고 단정해서, 소연은 잠시 할 말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말았다.
하지만 그 온기가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때의 소연은 아직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멀리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