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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다음 날 오전 8시, 학교 옥상 통로. 하은은 계단 벽에 등을 기댄 채 서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침 햇살이 채 닿지 않은 그 그늘진 자리에 웅크리듯 서 있는 뒷모습이 유독 작아 보였고, 가까이 다가가자 눈가가 살짝 붉어져 있는 것이 그대로 눈에 들어와 서윤은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무슨 일이야." 서윤이 다가서며 묻자, 하은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 보이려다가 그마저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도현이가… 나보다 다른 애랑 더 자주 얘기하는 것 같아서." 하은의 목소리가 잦아들며 끝내 서윤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고, 그 짧은 순간 계단 사이로 스며든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하은의 체온이 어깨를 통해 그대로 전해져, 서윤은 저도 모르게 하은의 등을 감싸 안았는데, 팔에 닿는 하은의 온기가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져서 손끝이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잠시 허공을 헤매다가 겨우 자리를 찾았다. "걔가 뭘 알아, 하은이 얼마나 예쁜지." 서윤이 애써 가벼운 투로 말을 얹었지만, 하은은 대답 없이 어깨에 얼굴을 더 깊이 파묻었고, 그 무게가 고스란히 서윤의 가슴께로 내려앉았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서윤이 나직이 속삭이자, 하은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윤을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본 하은의 눈동자에 눈물이 살짝 어려 있었고, 속눈썹 끝에 걸린 물기가 아침 햇살을 받아 미세하게 흔들리는 걸 마주한 순간 서윤의 가슴 한복판이 뜨겁게 조여들었다. "나, 이상한 거 아니지?" 하은이 코를 살짝 훌쩍이며 묻자, 서윤은 순간 숨이 막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상하긴, 누구나 그럴 수 있어." 겨우 말을 이었지만, 그 대답이 하은에게 하는 건지 자신에게 하는 건지 서윤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이건 그냥 친구를 위로하는 거야.' 서윤은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하은과 눈을 맞춘 그 짧은 순간이 필요 이상으로 길게 느껴졌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고, 하은이 팔을 풀고 한 걸음 물러선 뒤에도 서윤의 손끝에는 그 온기가 한동안 남아 있었다. 종이 울리기 전, 두 사람은 나란히 계단을 내려갔는데, 하은은 어느새 평소의 웃음을 되찾아 서윤의 팔을 붙잡고 재잘거렸지만 서윤은 그 웃음소리를 듣는 내내 조금 전 눈을 맞췄던 순간만이 자꾸 되풀이되어 떠올랐다. *** 같은 날, 1학년 3반 교실. 교실로 돌아온 뒤, 수아가 두 사람의 분위기를 눈치채고 다가와 낮게 물었다. "너 방금 표정, 하은이 볼 때마다 이상해지는 거 알아?" 수아의 직설적인 물음에 서윤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무슨 표정." 서윤이 애써 태연하게 되받았지만,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걸 수아가 놓치지 않았다. "몰라서 물어? 눈빛이 그냥 친구 보는 눈이 아니야." 수아가 팔짱을 끼며 서윤을 똑바로 바라보자, 서윤은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시선을 피했다. "그런 거 아니야." 서윤이 짧게 잘라 말했지만, 그 말이 스스로에게조차 힘없이 들렸다. 수아는 더 캐묻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윤을 바라보다가,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네가 아니라고 하면 나도 더 안 물어. 근데 너 눈, 지금도 흔들리고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윤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애써 그 말을 흘려버리려 했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수업 시간 내내 서윤의 시선은 몇 번이고 하은의 뒷모습으로 향했다가, 그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황급히 노트로 눈을 돌렸는데, 그 반복되는 움직임 속에서 서윤은 자신이 이미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인정해버린 기분이 들었다. *** 그날 밤, 서윤의 방. 침대에 누운 서윤은 좀처럼 잠들지 못한 채 몸을 뒤척였고, 이불 속에서 몇 번이나 자세를 바꿔봐도 낮에 있었던 옥상에서의 감각이 손끝에 남은 온기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감자, 오래전 기억이 갑작스레 밀려왔다. 중학교 시절, 같은 반 여학생을 유독 오래 바라보던 자신을 발견한 엄마가 어느 날 저녁, 식탁 맞은편에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던 그날의 장면이었다. "너, 걔 왜 그렇게 쳐다봐. 이상하게." 엄마의 그 한마디에, 어린 서윤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뜨거워지며 아니라고 소리쳤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고, 그때 젓가락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던 감각까지 함께 되살아났다. "그런 거 아니야, 왜 그렇게 봐!" 어린 서윤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엄마의 눈빛은 이미 무언가를 확신한 듯 서늘하게 굳어 있었고, 그 시선이 오래도록 서윤의 뒤통수를 따라다녔다. 꿈속에서 그 장면은 점점 뒤틀리며, 엄마의 얼굴이 서린의 얼굴로, 다시 하은의 얼굴로 겹쳐졌고, 그 얼굴들이 차례로 서윤을 향해 다가와 같은 표정으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이상해." 하은의 얼굴을 한 그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그렇게 속삭이는 순간, 서윤은 숨이 턱 막히는 감각과 함께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으며, 손끝은 이불을 움켜쥔 채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서윤은 어둠 속에서 한참을 앉아 숨을 고르다가, 창밖으로 흘러드는 가로등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그 빛이 방 안 어둠을 조금씩 갈라놓는 걸 지켜보며 겨우 숨을 가라앉혔다. 결국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든 서윤의 손에는 아직도 미세한 떨림이 남아 있었다. '이런 감정, 인정하면 안 돼.' 서윤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으며 새로운 게시물을 준비했는데, 평소보다 더 화려하고 더 완벽한 사진을 고르기 위해 갤러리를 몇 번이나 넘겨보다가, 조명이 가장 잘 잡힌 한 장을 골라 필터를 덧입히고 문구를 몇 번이나 고쳐 쓴 끝에 업로드했다. 그것이 자신을 증명하는 방법이라고 믿고 싶었고, 화면 속 완벽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서윤은 잠시 안심하는 듯한 기분마저 느꼈다. 하지만 사진을 올린 직후, 알림창에 뜬 이름 하나에 서윤의 손끝이 굳어버렸다. [한서린님이 댓글을 남겼습니다 : 오늘도 예쁘네, 근데 왜 눈은 슬퍼 보여.] 그 짧은 문장을 읽는 순간, 서윤은 마치 자신의 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서늘함에 온몸이 얼어붙었고, 화면 속 자신의 사진을 다시 확대해 눈을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웃고 있는 눈이었을 뿐인데, 그 눈을 슬프다고 짚어낸 그 한 문장만이 이상하게도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 같아서 화면을 끄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댓글창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내려가던 서윤의 눈에, 서린이 마지막으로 자신을 마주쳤던 날의 표정이 문득 겹쳐 떠올랐고, 그날도 지금처럼 서린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서윤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말을 던졌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되살아나면서, 서윤은 그 이름 하나가 앞으로도 자신을 이렇게 흔들어놓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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