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정략혼 상대는 용의 기사였다

5화

사흘이 지났다. 곽태산이 손수 준비한 배는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검은 돛에 낡은 뱃전, 남쪽 항구에서도 잘 쓰지 않는 종류의 배였다. 선원도 최소한으로 줄였고, 항구를 떠나는 순간부터 아무도 큰 소리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는 게 먼저다." 곽태산은 그렇게만 말했다. 서연은 그 말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왕가의 며느리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정작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길이라니.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다고 따질 처지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 갑판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웅도의 바다와는 달랐다. 그곳은 얼지 않는 바다였고, 이곳은 애초에 얼 일이 없는 더운 바다였다. 색조차 낯설었다. 짙은 남색이 아니라 탁한 청록이었다. 파도가 뱃전을 때릴 때마다 튀는 물방울조차 온도가 다르게 느껴졌다. "저기가 용암도입니다." 곽태산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서연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섬이 아니라 냄새였다. 유황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코끝이 시큰해질 정도로 진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등으로 코를 가렸다. "이 냄새, 계속 이런가요?" "익숙해지실 겁니다." 곽태산의 대답은 짧았고, 위로가 되지 않았다. 섬은 온통 검은 화산암으로 덮여 있었다.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서 있지 않았고, 하늘은 흐렸다. 재가 섞인 회색빛 안개가 산등성이를 감싸고 있었다. 배가 가까워질수록 그 풍경은 더 선명해졌고, 선명해질수록 더 을씨년스러워졌다. '이런 곳에서 다섯 달이라니.' 서연은 저도 모르게 팔을 문질렀다. 여름 나라의 더운 바람 속에서도 소름이 돋았다. *** 탑은 섬 중앙, 화산 봉우리 아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돌로 쌓아 올린 낡은 건물이었고, 창문 몇 개는 깨져 있었다. 이 정도로 방치된 곳에 왕가의 아들을 유배 보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났다. 곽태산은 탑 아래까지만 서연을 데려다주고는 배 쪽으로 되돌아갔다.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멀리 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 말을 남기고 그는 지체 없이 사라졌다. 남겨진 사람은 서연 혼자였다. 서연은 탑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배 위에서 며칠 동안 준비해 온 말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인사부터 해야 하나. 안부부터 물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웃어야 하나. 어느 것도 답 같지 않았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좁은 계단이 위로 이어져 있었고, 발을 디딜 때마다 낡은 돌 부스러기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 끝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낮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서연은 계단을 올라 방문 앞에 섰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그 틈으로 태현이 창가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은발이 흐린 빛 속에서도 선명했다. 옷차림은 단정했지만 방 안 전체에서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냄새가 났다. "저예요." 서연이 말했다. 태현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를 향했다. 놀란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귀찮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만으로도 서연은 자신이 준비한 인사말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깨달았다. "왜 왔지." "보러 왔어요. 남편이니까." 짧은 침묵이 흘렀다. 태현의 입가가 살짝 비틀렸다. 웃음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차가운 표정이었다. "곧 후회할 텐데." 예전에 정원에서 들었던 그 말이었다. "이미 후회할 만큼 후회했어요. 여기까지 오는 배 안에서." 서연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런데도 내렸잖아." "그러니까요." 서연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으로 나가버렸다. 창틀을 넘는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서연은 그가 이 방을 드나드는 방식이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피하려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 서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태선의 말이 떠올랐다. '그 아이가 밀어내더라도, 물러서지 말아라.' 편지에 적혀 있던 그 한 줄이 지금처럼 실감 나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그녀는 탑 밖으로 나와 섬을 걷기 시작했다. 딱히 목적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이 섬이 어떤 곳인지, 태현이 다섯 달을 어떻게 버텼는지 알고 싶었다. 화산암은 발밑에서 이상한 소리를 냈다. 걸음마다 작은 돌들이 부서지고 미끄러졌다. 화산암 지대를 지나 절벽 근처에 다다랐을 때, 서연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절벽 아래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있었다. 사람이 자주 다닌 흔적이었다. 흙이 다져져 있었고, 발자국 같은 흔적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누가 이런 길을 냈을까.' 서연은 잠시 멈춰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길은 가팔랐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길을 따라 내려가자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안쪽은 예상보다 넓었고, 바닥에는 시커멓게 눌어붙은 흔적과 커다란 비늘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비늘이었는데, 색이 붉은 기를 띠고 있었다. 벽은 열기에 그을려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이 안에서 불이 타올랐던 것처럼. '적염이 여기서 지내는구나.' 서연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려 했지만 화산암 바닥에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동굴 깊은 곳, 바위틈에 낡은 나무함이 놓여 있었다.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지만 누군가 최근에 만졌던 듯 뚜껑이 살짝 어긋나 있었다. 서연은 무릎을 굽히고 함을 열었다. 나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동시에 올라왔다. 안에는 색이 바랜 편지 한 장과, 은으로 만든 작은 노리개가 들어 있었다. 여자의 것이었다. 세공이 정교했고, 값이 나갈 만한 물건이었다. 이런 곳에, 이렇게 숨겨져 있을 이유가 없는 물건이었다. '이건…' 서연의 손끝이 멈췄다. 편지의 글씨는 흐릿했고, 서연이 채 한 줄을 읽기도 전에— 그때, 동굴 입구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태현이었다.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냉소가 아닌 다른 것이 느껴졌다. 낮게 가라앉은, 서연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서연은 노리개를 손에 쥔 채 천천히 몸을 돌렸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