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 밤, 그녀의 가정부

2화

면접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자리였다. 약속한 시간보다 십오 분이나 일찍 도착해서는, 로비 한가운데 놓인 대리석 안내판 앞을 서성이며 시간을 죽였다. 유리로 된 벽면 가득 도시가 비쳐 들었고, 로비를 오가는 사람들은 다들 나보다 훨씬 단정하고 자신 있어 보였다. 나는 재킷 소매를 몇 번이나 끌어내리며 손목을 가렸다. 손바닥에 벌써부터 땀이 배어났다. 서류 봉투를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가, 그 사소한 동작을 반복하며 초침이 움직이는 속도를 세고 있었다. 십 분쯤 그러고 있었을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 안에서 걸어 나온 사람을 본 순간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젯밤 그 여자였다. 정장을 갖춰 입고 머리를 단정히 틀어 올린 모습이 술집에서 봤을 때와는 다른 사람 같았다. 그때는 풀어진 셔츠 사이로 어깨선이 드러나 있었고, 눈빛도 지금보다 훨씬 흐트러져 있었으니까. 지금은 완벽하게 갖춰 입은 갑옷 같은 정장 안에서, 걸음걸이마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 그런데도 겨울바람처럼 시리고 묵직한 그 향만은 그대로였다.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코끝에 남는, 서늘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어젯밤의 기억이 등줄기를 타고 훅 끼쳐 올랐다. "김하늘 씨?" 그녀가 서류를 내려다보며 무심하게 이름을 확인했다. 나를 못 알아본 척하는 건지, 정말 몰라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얼어붙은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윤지수입니다." 그녀가 짧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 순간 옆에서 커피를 든 여자가 나를 보며 눈을 크게 뜨더니, 곧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서은이었다. 어젯밤 나에게 먼저 말을 건 그 사람. 어젯밤에는 짙은 향수와 반짝이는 귀걸이가 눈에 들어왔는데, 오늘은 단정한 블라우스 차림에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 같으면서도, 나를 알아보는 그 눈빛만은 어제와 똑같았다. "어머, 재밌네." 서은이 나지막이 중얼거렸을 때 윤지수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 그 짧은 순간, 공기가 팽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서은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딴청을 부렸다. 우리는 로비 한쪽에 마련된 작은 회의실로 옮겨 앉았다. 유리벽 너머로 사람들이 오가는 게 보이는, 완전히 밀폐되지도 완전히 개방되지도 않은 그런 공간이었다. 윤지수가 테이블 위에 서류 몇 장을 펼쳐놓았다. 면접이라기보다는 통보에 가까운 대화가 이어졌다. "청소, 세탁, 간단한 요리." 그녀가 손가락으로 서류의 항목을 하나씩 짚어가며 읽어 내려갔다. "주 5일,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식사는 제공하고, 야근이 필요할 경우 별도 수당을 지급합니다." 목소리에는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사무적이고 건조한, 딱 필요한 정보만 전달하는 말투였다. 나는 그 말투 안에서 어젯밤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애초에 그런 밤이 없었던 것처럼. "가사관리 경력은 없으시네요." 그녀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네, 없어요……." 나는 말끝을 흐렸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서류 봉투를 놓칠 것 같았다.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상관없어요."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웠는데도 이상하게 그 안에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경멸인지, 흥미인지, 아니면 그냥 무심함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성실하면 됩니다. 다만 이건 확실히 해두죠." 그녀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계약서 한 장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길고 가늘었는데, 손톱 끝에는 옅은 상처 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어젯밤 내 어깨를 그렸던 그 손이었다. "여기 적힌 대로, 이건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예요. 어젯밤 일과는 상관없이." 그 말이 뺨을 때리듯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계약서를 받아 든 손이 떨리는 걸 숨기려고 애썼지만, 종이 끄트머리가 파르르 흔들리는 걸 그녀도 분명 봤을 것이다. 옆에서 서은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창밖을 보는 척했다. "……네, 알겠습니다."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듯 작았다. 서류에 서명을 하는 순간, 손끝이 사인펜을 제대로 쥐지 못해 글자가 삐뚤어졌다. 이름 세 글자를 겨우겨우 그어 내려가는데, 그 옛날 병원 대기실에서 진료 동의서에 서명하던 손이 떠올랐다. 스물한 살, 대학교 휴학계를 낸 직후였다. 형광등이 지나치게 밝던 정신과 대기실, 소독약 냄새와 낡은 소파의 가죽 냄새가 뒤섞인 그 공간에서 나는 몇 번이나 서명을 다시 해야 했다. 잠을 못 자는 날이 늘어가고, 손목에 붉은 선을 그어야만 겨우 숨이 쉬어지던 시기가 있었다. 상담 선생님은 그게 '자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알려줬지만, 그때 나에겐 그저 살아있다는 증거를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칼끝이 살갗을 그을 때마다 느껴지던 그 서늘한 통증이, 이상하게도 그날 하루를 견디게 해주는 유일한 감각이었다. 지금도 왼쪽 손목 안쪽에 옅게 남은 흉터가, 소매를 걷을 때마다 조용히 존재를 드러냈다. 오래되어 하얗게 색이 빠진 흉터였지만, 밝은 조명 아래서는 여전히 선명하게 그 존재를 증명했다. 윤지수가 서명한 계약서를 다시 가져가며 나를 힐끗 봤다. 그 시선이 정확히 내 손목께에 머물렀다. "손목은 왜 그래요." 그녀가 무심코 물었다. 심장이 갓 잡은 활어처럼 펄떡였다. 나는 손목을 서둘러 옷소매로 가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서류를 정리하며 종이 끄트머리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더니, 나를 잠깐 응시했다가 다시 시선을 거뒀다. "내일 아침 8시, 늦지 마세요." 짧게 말했을 뿐이었다. 그 건조한 말투 안에 배려가 숨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냉정한 지시인지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어젯밤 이불 속에서 봤던 어깨선과 지금 정장 재킷 안의 어깨선이 같은 사람의 것이라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서은이 슬쩍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커피컵을 든 손끝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둘이 무슨 사이예요?" 그녀의 눈이 재미있다는 듯 반짝였다. 나를 위아래로 훑는 그 시선이 마치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발견한 사람 같았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나는 서둘러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갈라지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그치? 알겠어." 그녀는 씩 웃으며 더 캐묻지 않았지만, 그 웃음이 왠지 뭔가를 다 안다는 듯 느껴져서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서은이 먼저 걸어나가면서 어깨너머로 한 번 더 나를 돌아봤다. 그 눈빛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로비를 빠져나와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동안 다리가 후들거렸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젯밤의 그 여자가 오늘 나의 고용주가 되었다는 사실이, 마치 꿈속에서 겪은 일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계속 손목을 만지며 생각했다. 버스 창문에 이마를 대자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을 하나씩 세다가, 다시 손목의 흉터를 매만졌다. 내일부터, 나는 어젯밤 함께 잤던 여자의 집을 청소하러 가야 한다. 심장이 다시 갓 잡은 물고기처럼 펄떡였다. 잘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더 무서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견딜 수 있을까.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서고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소리,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나는 여전히 손목을 매만지며, 내일 아침 그 서늘한 시선 앞에 다시 서게 될 나 자신을 상상했다. 그 상상만으로도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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