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왕궁 서편의 접견실은 늦은 오후의 황금빛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그 빛조차 방 안에 감돈 냉기를 데우지는 못했다. 창밖으로 늘어선 참나무 가지 사이로 스며든 빛살이 대리석 바닥 위에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렸고, 그 그림자는 마치 방 안의 정적을 재는 눈금처럼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윤서인은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채, 앞에 무릎을 꿇은 하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마치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마른 잎사귀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방 안에는 서인과 하녀, 그리고 문가에 선 근위 기사 한 명뿐이었다.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는 오래전 왕가의 문장을 수놓은 것이었는데, 세월에 색이 바래 이제는 짙은 자줏빛이 마른 핏자국처럼 보였다. 그 아래로 촛대 하나가 놓여 있었지만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채였고, 그래서인지 방 안은 낮인데도 어딘가 저녁 무렵의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다시 말해보아라." 서인의 목소리는 낮고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칼날처럼 벼려진 냉정함이 숨어 있었다. "백작 부인의 몸에 변화가 생긴 것이 언제부터였다고?"
하녀는 입술을 달싹였으나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손끝이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가 놓았다가를 반복했는데, 그 조그만 움직임이 방 안의 침묵을 더욱 무겁게 만드는 듯했다. 옆에 선 근위 기사가 발끝으로 바닥을 툭 치자 그제야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두, 두 달 전이었습니다, 마님. 그때부터 입맛이 변하시고, 아침마다 속을 다스리시는 일이 잦아지셨습니다. 처음엔 그저 몸이 편찮으신가 하였는데, 유모가 배를 짚어보고는… 낯빛이 하얗게 질려서는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서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하녀의 말이 공기 중에 흩어지도록 잠시 내버려두었다. 그런 종류의 침묵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상대가 스스로 그 무게에 짓눌려 더 많은 것을 토해내게 만드는 침묵이었다.
왕국의 모든 남성이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된 것은 이제 십수 년째 이어져 온 저주였다. 흑란이라는 이름의 마녀가 왕실에 무슨 원한을 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날 이후로 귀족가의 안방마다 후계자를 두지 못한 침묵이 내려앉았고, 그 침묵은 곧 왕국 전체의 불안으로 번져 나갔다. 처음 몇 해는 사람들도 하늘의 벌이라 여기며 신전에 재물을 바치고 사제를 불러 기도를 올렸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 믿음도 무뎌졌고, 이제는 그저 견뎌야 할 병처럼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왕가조차 후사를 잇지 못해 방계의 어린 조카를 세자로 세우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저주의 무게가 얼마나 깊이 왕국의 뼈대를 갉아먹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궁정 곳곳에서 상식을 뒤엎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임신할 수 없는 남편을 둔 부인들의 배가 하나둘 불러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소문으로만 떠돌았으나, 이제는 세 곳의 백작가와 한 곳의 후작가에서 같은 일이 확인되었다. 은밀히,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는 소문 속에서, 왕실은 이 기이한 잉태의 근원을 찾아내야 했다. 그것이 축복인지 또 다른 저주의 서곡인지, 아직은 누구도 알지 못했으므로.
서인은 손끝으로 의자 팔걸이를 천천히 두드리며, 자신의 배 속에 아직 한 번도 자리를 잡지 못한 생명을 떠올렸다. 그 헛헛함이 명치 아래로 퍼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얼른 표정을 다잡았다.
*지금은 그런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야.*
수년째 되풀이해온 다짐이었다. 저주가 시작된 이래로 그녀 역시 단 한 번도 아이를 품어보지 못했고, 그 사실은 밤마다 그녀를 갉아먹는 벌레와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방에서만큼은, 그녀는 그저 왕명을 받은 조사관이어야 했다. 사사로운 결핍은 접견실 문밖에 두고 왔어야 마땅했다.
"두 달 전이라면." 서인이 말을 끊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무렵 백작가에 새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나?"
하녀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마침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저택 정원 일을 돕던 소년이 하나 있었습니다만... 그저 잡일을 하는 아이였을 뿐이라... 마님께 아뢸 만한 일이라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 아이가 부인의 방 근처에 드나든 적이 있었나."
"그, 그것은..." 하녀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정원에서 꽃을 꺾어 방으로 가져다드리는 심부름을 몇 번 하였습니다. 부인께서 그 아이를 어여삐 여기셔서..."
"어여삐 여기셨다." 서인이 낮게 되풀이했다. 그 말속에 담긴 함의가 무엇인지 짐작하고도 남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등을 곧게 세우고 하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더욱 무게를 실었다.
"이름은."
하녀의 목이 크게 오르내렸다. 그 침묵이 방 안을 가득 메우며, 마치 누군가 숨을 참고 있는 듯한 무게로 내려앉았다. 창밖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렸고, 그 날갯짓 소리가 침묵을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근위 기사조차 숨을 죽인 채 하녀의 입만을 지켜보았다.
"도윤이라 불리는 자였습니다."
서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이름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낯익음을 품고 있었던 탓이었는데, 그것이 자신의 저택에서 부리는 노예 소년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윤.*
그녀의 저택 정원 한구석, 뒷마당에서 잡초를 뽑고 장작을 패는 일을 하던 그 아이의 이름이었다. 몇 달 전 백작가에서 손이 부족하다며 잠시 빌려달라 청해왔던 것을 기억한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러라 허락했던 것도 기억한다. 그때는 그저 흔한 인력 대여 정도로 여겼을 뿐, 그 이름이 이런 방식으로 다시 자신의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했고, 서인은 자신의 손톱이 팔걸이를 파고드는 것도 잊은 채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나는 나무 마찰음이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 하녀는 그 소리에 놀라 어깨를 움츠렸고, 근위 기사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곧게 세웠다.
서인은 하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걸음마다 치맛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는데, 그 발소리가 어딘가 무언가를 향해 미끄러져 다가가는 뱀의 움직임처럼 느릿하고도 조용했다.
"그 아이는." 서인이 하녀 앞에 우뚝 멈춰 서서 내려다보며 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그 안에 깃든 서늘함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결을 띠고 있었다.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녀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바닥에 이마가 닿을 듯 몸을 낮췄다. "그, 그것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마님. 백작가에서 일을 마친 뒤로는..."
서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하녀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저택 뒷마당에서 묵묵히 장작을 패고 있을 소년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제나 시선을 피하며 낮게 고개를 숙이던, 그 조용하고 어딘가 서늘한 눈빛을 가진 아이였다.
*설마.*
그 한 글자짜리 의심이 그녀의 명치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