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손가락만 한 몸을 가진 존재가 저택 처마 밑 그늘에 몸을 숨긴 채, 아래쪽 마당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초록빛 날개는 접혀 있었으나 그 끝이 미세하게 떨렸는데, 그것은 흥미보다는 오래된 상처가 건드려진 자의 반응에 가까웠다. 나리는 요정귀 끝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아래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소란을 무심하게 지켜보는 척했다.
처마 그늘은 서늘했고, 늦은 오후의 햇살은 마당의 흙바닥 위로 황금빛과 먼지의 색을 뒤섞어 뿌리고 있었다. 나리가 앉은 자리에서는 저택 전체가 내려다보였는데, 회색 석조 벽과 낡은 나무 기둥들이 오래된 뼈처럼 서 있는 그 풍경은 이 집안의 위세가 이미 한물간 지 오래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권력놀음은 여전히 팽팽했으니, 힘없는 자에게 휘두르는 폭력만큼은 조금도 낡지 않은 채였다.
임무는 단순했다. 흑란의 저주를 풀어낼 단 하나의 존재—다산의 씨앗을 품을 수 있는 인간을 찾아, 그에게 축복을 내리고 지켜보는 것. 요정왕은 그것을 사자로서의 소임이라 불렀지만, 나리에게 그것은 단순한 임무가 아니었다.
*흑란,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잊었을 리 없겠지.*
그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나리의 가슴 한편에서 오래된 불씨가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백 년도 더 지난 일이었으나,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자신의 자매가 흑란의 손에 스러진 그날의 기억은, 나리의 초록빛 날개 아래 언제나 그림자처럼 매달려 있었다. 겉으로는 냉정한 사자였지만, 그 냉정함은 사실 원한을 태우는 재의 색이었다.
기억은 늘 같은 장면에서 시작되었다. 자매의 날개가 찢겨 나가던 순간의 비명, 그리고 그 뒤에 남은 정적. 나리는 그 정적을 지금도 귓속 어딘가에 담고 있는 듯했다. 시간이 흐르며 몸은 자랐고 힘은 쌓였으나, 그 정적만은 조금도 옅어지지 않은 채 나리를 따라다녔다. 요정왕이 사자의 소임을 내렸을 때, 나리는 겉으로는 담담히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이미 답을 정해 놓고 있었다. 흑란에게 갚아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도윤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억눌린 채 살아가는 인간의 몸에 저주를 되돌릴 힘을 심어놓는 것—그것이 나리가 흑란에게 되갚을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식이었다. 억눌림이 클수록 반동은 크다는 것을, 나리는 오랜 세월 관찰해온 인간의 습성 속에서 배운 바였다. 부러진 가지가 다시 튀어 오를 때 그 힘이 가장 세다는 것을, 나리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리는 그 계산을 스스로에게조차 온전히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소임을 다하는 것뿐이야. 그 이상은 아니야.*
속으로 되뇌는 말은 언제나 같았지만, 그 말을 되뇌는 빈도가 늘어갈수록 오히려 스스로도 그것이 거짓임을 깨닫는 것이었다.
마당 쪽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택의 주인, 강태준의 것이었다.
"이 게으른 놈이! 감히 부인의 방 근처를 얼씬거려?"
목소리는 마당의 공기를 통째로 흔드는 듯했고, 저택 곁채에서 일하던 다른 하인들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거나 걸음을 재촉해 그 자리를 피했다.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이 집안에서 태준의 분노 앞에 나설 만한 자는 없었으므로.
나리는 그늘 속에서 시선을 돌려 아래를 살폈다. 도윤이라는 소년이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 어깨가 잔뜩 굽어 있는 모양이 마치 매를 맞기 직전의 짐승처럼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열여덟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왜소한 체구는 오랜 굶주림과 노동으로 깎여 나간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으며, 그 눈빛만이 유일하게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손등에는 오래된 상처의 흔적이 검붉게 남아 있었고, 목덜미에는 이제 막 아물기 시작한 채찍의 자국이 옷깃 밖으로 살짝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뜻이었으며, 오히려 이런 순간이 그의 일상에 가까운 무엇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도윤은 아버지가 남긴 빚 때문에 이 저택에 팔려 온 노예였다. 아버지의 얼굴조차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살아남기 위한 굴종뿐이었다. 어머니는 그가 이 저택에 팔려 오기도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으니, 도윤에게는 돌아갈 곳도 기댈 곳도 없었다. 그가 아는 세계는 오로지 이 저택의 담벼락 안쪽뿐이었고, 그 안에서 그는 언제나 가장 밑바닥에 놓인 존재였다.
"제, 제가 아니었습니다, 주인님. 그저 물을 나르던 길이었을 뿐입니다."
도윤의 목소리는 낮았고, 억지로 눌러 담은 떨림이 그 끝에 매달려 있었다. 흙바닥에 짚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나리의 눈에도 보였다.
"닥쳐라." 태준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내 아내의 방 근처에 노예 놈이 얼씬거리는 것을 내가 못 봤을까 봐?"
태준의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관자놀이의 핏줄이 도드라지게 곤두선 채였다. 그는 도윤을 향해 성큼 다가서며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네놈이 감히, 내 눈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게냐?"
도윤은 고개를 더 낮게 숙였다. 그 순간 그의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가 아주 잠깐, 나리조차 놓칠 뻔한 속도로 스쳐 지나갔는데,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차가운 냉소였다.
나리는 그 표정을 알아보았다. 억눌린 것이 오래되면 언젠가 반드시 터져 나온다는 것을, 나리 자신도 백 년의 시간 동안 뼈저리게 배워온 사실이었으므로. 저 눈빛은 아직 어린 짐승의 것이 아니었다. 이미 여러 번 짓밟히고도 완전히 꺾이지 않은 자의 것이었다.
*저것이다. 저 눈빛이 필요한 것이다.*
나리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확신으로 굳어졌다.
태준의 손이 허리춤의 매를 향해 뻗어가는 것을 나리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도윤이 겪는 고통이 깊을수록, 그 안에 심어놓은 축복이 발현될 때의 반동은 더 강렬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나리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의 손잡이가 태준의 손아귀에 감기며 가죽 특유의 마른 소리를 냈다. 마당을 메우던 소란이 순간 잦아들고, 오직 그 소리만이 공기 중에 선명하게 울렸다. 도윤은 몸을 더욱 움츠렸으나 시선만은 여전히 바닥을 향한 채였고, 그 고개 숙인 모습 속에서 나리는 오래전 자신의 자매가 흑란 앞에서 지었던 표정을 아주 잠깐 겹쳐 보았다.
바람 한 줄기가 처마 그늘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리의 날개 끝이 다시 한번 떨렸다.
태준의 팔이 허공으로 높이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