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눈떠보니 벌레 여자였다

4화

왼쪽으로, 왼쪽으로. 발이 이끄는 방향은 그것뿐이었다. 머리로는 아무 계산도 서지 않았는데 몸이 먼저 방향을 정해버린 느낌이었달까. 등 뒤에서 들려오던 규칙적인 발소리가 점점 벌어지는 듯싶더니 어느 순간부터 방향이 갈라지는 게 느껴졌다. 갈라진다는 게 좋은 신호인지 나쁜 신호인지도 판단이 안 됐지만, 일단 우리 쪽으로 좁혀지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나 싶었다. 나는 선우의 손을 놓칠까 봐 손가락에 힘을 더 주었는데, 그의 손이 이렇게 차가운가 싶어서 새삼스러웠다. 원래 사람이었을 때는 온도를 느낄 새도 없었는데, 지금은 손끝 갈고리 사이로 스며드는 냉기까지 신경이 곤두섰다. 이 몸으로 바뀌면서 감각이 예민해진 건지, 아니면 그냥 지금 상황이 너무 절박해서 모든 게 다 예민하게 느껴지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아마 후자겠지. 지금 이 순간 심장이 안 뛰는 게 이상할 정도니까. 큰 나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뿌리가 지면 위로 솟아 있는 형태가 마치 거대한 손가락을 벌린 것처럼 틈을 만들고 있었는데, 사람 두 명이 겨우 몸을 접어 넣을 정도의 공간이었다. 이런 걸 발견하는 눈은 또 어디서 생긴 걸까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저기." 나는 짧게 말하며 그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고, 선우가 뒤따라 들어오면서 등을 붙이자마자 우리는 동시에 숨을 죽였다. 좁았다. 좁아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몸이 서로 밀착되니 그의 심장 소리인지 내 심장 소리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는데, 아니 우리한테 심장이 있긴 한가, 이 몸이. 그런 쓸데없는 생각까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발소리는 여전히 규칙적이었다. 하나, 둘, 하나, 둘. 사람이 걷는 소리라기보다는 뭔가를 훈련받은 것처럼 정확한 박자였는데, 그게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짐승이라면 저렇게 일정할 리가 없잖아. 짐승은 냄새를 맡다가 멈추고, 소리를 듣다가 방향을 틀고, 그런 식으로 리듬이 깨지는 법인데. 그럼 뭐지, 사람인가. 아니면 사람이 아닌데 사람처럼 훈련된 무언가인가. 생각이 거기까지 가자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고, 나는 선우의 팔을 붙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선우도 숨을 참는 게 느껴졌는데, 그의 귀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니 저 소리가 그에게는 나보다 훨씬 크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이 몸이 되면서 각자 예민해진 감각이 다른 건지, 아니면 원래도 청각이 좋았던 사람인지 궁금했지만 지금 물어볼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의 손을 조금 더 꽉 쥐는 것으로 괜찮다는 말을 대신했다. 실은 나도 괜찮지 않으면서. 발소리가 우리 앞을 지나칠 무렵, 나뭇잎 사이로 얼핏 그림자가 스쳤다. 사람 형태였는지 아니었는지도 확실치 않았는데, 확인하려고 고개를 내밀 용기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만약 저게 사람이라면 도움을 청해야 하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저게 사람의 형태를 한 무언가라면 그게 더 최악의 상황인 걸까. 답이 없는 질문을 머릿속에서 굴리는 동안 발소리는 서서히 멀어져 갔다. 다행히 그 발소리는 우리를 지나쳐 갔다.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우리는 한참을 더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었는데, 이게 무섭다는 감정이 아니라 이미 무서움을 넘어선 어떤 마비 상태 같은 거였다. 손끝이 저리고 머리가 멍한, 그런 상태. "갔어." 선우가 먼저 입을 뗐고,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것 같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리는 걸 감추려고 애써 담담하게 말했는데,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다. 몸을 펴자 뻣뻣하게 굳었던 갑각이 뻐끔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런 소리까지 나는 몸이라니, 참 시끄러운 존재로 바뀌었구나 싶어서 실없이 웃음이 나올 뻔했다. 선우도 몸을 펴며 나뭇가지에 걸린 등을 슬쩍 살폈는데, 다친 데는 없어 보여서 안심이 됐다. 그때 손바닥 크기의 얇은 판이 다시 허공에 떠올랐다. 처음 봤을 때보다는 놀라지 않았는데, 이젠 이 시스템이란 게 우리를 감시하는 건지 돕는 건지 판단이 안 됐다. 도움이 되는 정보를 주는 건 맞는데, 왜 하필 이 타이밍에 나타나는지, 그리고 왜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나타나는지, 그 규칙 자체를 알 수 없다는 게 제일 불안했다. 글자가 스스로 그려지고 있었다. [여명숲 - 서측 경계 근접] [주변 3급 포식종 활동 감소 구간] [반경 300미터 내 은신 가능 지형 확인] "은신 가능 지형이라니, 이게 좋다는 거야 나쁘다는 거야."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고, 선우가 옆에서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좋다는 거겠지. 적어도 지금은." 그의 목소리에 낭랑한 울림이 섞여 있었는데, 밤이 되면 더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사람이었을 때는 무뚝뚝하고 낮은 목소리였을 텐데, 지금은 마치 종이 울리는 것처럼 맑았다. 이런 목소리로 협박하듯 말하면 얼마나 안 무서울까 싶으면서도, 지금 상황에서는 그 낭랑함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사람 말투 그대로인데 소리만 달라진 거라 더 낯설고, 그 낯섦이 또 묘하게 그를 더 그답게 만들어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근데 저건 왜 하필 지금 뜨는 거야." 내가 물었더니 선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가 위험을 넘겼다는 걸 판단한 다음에 뜨는 거 아닐까. 아니면." "아니면?" "그냥 재수 좋게 이 시점에 뜬 걸 수도 있고." 선우의 대답이 너무 무책임해서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정보 시스템이라는 게 되게 즉흥적이네." "우리 상황이 즉흥적인데 시스템만 체계적일 리가 있나." 그 말이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어서 나는 더 반박하지 못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나는 물었고, 선우는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선을 하나 긋고, 그 위에 점을 찍고, 다시 다른 방향으로 선을 그었다. 나름 지도라고 그리는 모양이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어린애 낙서 수준이었다. "일단 원래 있던 방향, 그러니까 우리가 처음 도착한 지점을 기준으로 생각해보자. 거기서 왜 우리가 여기로 떨어졌는지는 몰라도, 돌아갈 방법이 있다면 그 근처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 개연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논리였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거라도 붙잡아야 했다. "근데 거긴 위험한 울음소리가 나던 방향이잖아." 나는 반박했고, 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그렇지. 그러니까 당장 가자는 게 아니고, 일단 안전한 곳을 몇 개 확보하면서 조금씩 접근하자는 거야." "몇 개나." "모르지. 갈 때마다 판단해야지." "그건 계획이 아니라 그냥 무계획을 있어 보이게 말한 거잖아." 내가 쏘아붙였더니 선우가 낭랑한 목소리로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온다는 게 신기했는데, 나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이게 무슨 정신머리인가 싶으면서도, 그 웃음 하나가 잠깐이나마 숨통을 틔워준 건 사실이었다. 말은 쉬웠다. 그런데 3급 포식종이라는 것들이 어슬렁거리는 숲에서 조금씩 접근한다는 게 가능한 계획일까. 나는 의심이 들었지만 딱히 다른 대안이 없었으므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은 어디로." "저 판이 알려준 은신 가능 지형으로." 선우가 몸을 일으키며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으며 갑각 사이로 스며드는 그의 체온을 다시 느꼈다. 여전히 차가웠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덜 낯설게 느껴졌다. 걷는 동안 나는 계속 뒤를 살폈는데, 그 규칙적인 발소리의 정체가 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이라면 왜 우리를 쫓았을까, 사람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그렇게 정확한 박자로 움직일 수 있을까. 답은 나오지 않았고, 나는 그 질문을 마음 한구석에 밀어 넣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숲의 나무들이 여전히 희미한 빛을 뿜으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이 감시인지 그냥 발광 현상인지도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발밑에서 이따금 낙엽 대신 이상한 촉감이 밟혔다. 물컹하다가도 딱딱하고, 딱딱하다가도 축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밟을 때마다 소름이 돋았지만 멈춰서 확인할 용기는 없었다. 그냥 밟고 지나가는 게 최선이었다. 확인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선우는 걷는 내내 별말이 없었다. 가끔 앞서 나가서 나뭇가지를 툭툭 부러뜨려 방향을 표시했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그의 등을 눈으로 좇았다. 저 등이 사람의 등이었을 때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지금 이 갑각 아래 어떤 얼굴이 숨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이내 부질없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그냥 이 모양이 우리 전부였다. 그걸 받아들이는 게 먼저였다. 그렇게 삼십 분쯤 걸었을까, 갑자기 배 속에서 이상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배가 뒤틀리는 정도였는데, 걸음을 옮길수록 그 통증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마치 안에서 뭔가가 손톱으로 벽을 긁는 느낌이었다. 아니, 손톱보다는 더 단단한 무언가로. "잠깐." 나는 멈춰 서서 배를 감쌌고, 선우가 놀란 얼굴로 돌아봤다. "왜 그래."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뭔가 안에서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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