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차가운 쇠붙이가 목덜미에 닿는 감각으로 정신이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낯선 천장이 아니라, 코앞까지 들어온 창날이었다.
날 끝에 맺힌 빛이 흔들렸다. 내 눈동자가 흔들린 탓이었다.
“마왕. 오늘로 끝이다.”
낮게 깔린 여자 목소리였다. 비늘 같은 갑주를 걸친, 뱀 눈을 가진 여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세로로 길게 갈라진 채, 동공에는 감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숨이 턱 막혔다. 정확히는 목이 막힐 뻔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다. 검 끝이 그만큼 가까웠으니까.
“……뭐, 뭐지 이건.”
말이 헛나왔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가늘고, 높고, 낯설었다. 마치 누가 내 성대를 뜯어다가 다른 걸 끼워 넣은 느낌이었다.
생각할 틈도 없이 침대에서 몸을 굴려 피했다. 놀랍게도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반사신경이 이렇게 좋았던가, 나는 이렇게 유연한 몸이 아니었는데. 관절이 뻐근하다는 느낌조차 없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헬스장 근처도 못 가본 몸이 이럴 리가 없는데.
쿵!
검이 침대를 반으로 갈랐다.
비단이불이 순식간에 걸레짝이 되는 걸 보고서야 실감이 났다. 저거 진짜 칼이었구나. 죽을 뻔했구나. 솜뭉치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걸 보면서, 나는 그게 방금 전까지 내 배가 있던 자리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진다는 게 더 이상했다. 이건 내 등이 아닌데. 내 등이 언제 이렇게 매끈했다고.
“도망쳐봤자 소용없다. 오늘은 우리 아홉 모두가 뜻을 모았으니까.”
아홉? 나는 방을 둘러보았다. 창가에, 문 앞에, 심지어 천장 구석에까지 여자들이 늘어서 있었다. 각기 다른 뿔, 각기 다른 날개, 각기 다른 눈동자를 가진 여자들이 하나같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창문 밖에서 매달려 있는 이도 있었다. 날개가 박쥐를 닮은 여자였는데, 그 자세로 벌써 몇 분째 대기 중이었는지 표정이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포위망이라기보다는 공개 처형장 같았다. 관객만 아홉 명인.
그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뇌 속에서 뭔가가 재배치되는 느낌이었다.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다운로드가 완료된 파일이 압축을 풀며 쏟아지는 것처럼.
마탑정복.
성인 게임. 십팔금 딱지 붙은, 그것도 퀄리티는 애매하고 시나리오만 유별나게 진지했던 그 게임. 그래픽은 십 년 전 수준인데 세계관 설정집만 A4 오십 장을 넘겼던, 그 기묘한 밸런스의 게임.
주인공은 서지아라는 여자애였고, 최종보스는 마왕 유서린. 게임 속 설정으로는 잔혹하고 방탕하며 부하들을 인형처럼 다루는 악녀. 결말에서 서지아에게 패배하고 예속당한다. 엔딩 스틸컷까지 기억났다. 무릎 꿇은 유서린이 목줄을 차고 있는, 그 노골적인 그림.
그리고 지금, 이 뾰족한 검 앞에서 눈을 뜬 이 몸이 바로 그 유서린이라는 사실이, 무섭도록 명확하게 자각됐다.
“……나 박준서인데.”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백수였다. 서른 넘어서까지 취업 못 하고 방구석에서 게임만 하던, 그 박준서. 심장마비로 죽었던 것까지 기억이 났다. 편의점 삼각김밥 먹다가 그대로 뻗었지, 그게 마지막이었다. 참치마요였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먹은 게 참치마요였다는 게, 왜 지금 이 순간에 떠오르는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왜 여자냐고. 그것도 왜 최종보스냐고. 신은 있다면 취향이 참 고약한 게 분명했다.
“뭘 중얼거리는 거야, 마왕.”
아까 그 뱀눈 여자, 이름이 기억났다. 카시아. 마장군 중 하나였다. 게임에서는 서지아 편으로 넘어가는 배신 이벤트가 있던 캐릭터였다. 냉정하고 계산적인, 아홉 마장군 중에서도 가장 먼저 등을 돌리는 인물.
지금이 딱 그 배신 타이밍인가?
아니, 게임 시나리오상 이 배신은 서지아가 도래한 이후에 일어나야 하는 이벤트였다. 근데 서지아는 아직 오지도 않았을 텐데. 부하들이 자체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건가.
그렇다면 이건 정규 루트가 아니었다. 뭔가 어긋난 상태에서 시작한 회귀, 혹은 이입, 혹은 뭐라 부르든 좋을 그 현상이었다.
생각할수록 답이 나오지 않아서, 나는 침대 반대편으로 계속 뒹굴며 거리를 벌리는 데만 집중했다. 머리는 나중에 굴려도 됐다. 지금은 목이 붙어 있는 게 먼저였다.
“여기까지 몰렸는데도 도망칠 구석을 찾는 거냐.”
다른 목소리, 이번엔 뿔 달린 여자였다. 이름은 몰랐다. 아니, 알 것 같았다. 마장군 아홉 명 전부가 게임 데이터로 내 머릿속에 저장돼 있었으니까. 이름, 무기, 배신 시점까지 전부.
문제는 그 데이터가 전투 스킬셋이나 배신 시점 같은 시나리오 정보뿐이라는 거였다. 지금 이 몸으로 어떻게 저 검을 막아야 하는지는 전혀 몰랐다. 마법을 쓸 수 있는지, 힘이 얼마나 되는지, 그런 실전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게임 데이터베이스가 튜토리얼도 없이 하드모드로 던져진 느낌이었다.
“자, 잠깐, 이거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오해? 웃기는군. 오해로 그동안 우리를 그렇게 부려먹었나.”
부려먹었다니. 나는 아무것도 한 적이 없는데. 아, 아니지. 이 몸의 진짜 주인, 원래의 유서린이 뭘 어떻게 했는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었다.
억울했다. 죄는 전임자가 짓고 벌은 후임자가 받는, 이 무슨 부당해고급 시추에이션인지.
등 뒤에 벽이 닿았다.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카시아가 검을 다시 들어올렸다. 순간 눈앞이 흐려지고, 심장이 쥐어짜이는 통증이 느껴졌다. 이게 죽음의 예고편인가. 아까는 이불이었지만 이번엔 진짜 내 목이겠지.
죽는 건 한 번으로 충분했는데.
두 번째 죽음이라니. 삼각김밥으로 죽고, 이번엔 창에 찔려 죽고. 죽음 콜렉터가 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팔자인지.
그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몸은 살겠다고 옆으로 미끄러졌다. 검이 벽을 파고들었다.
콰직!
돌가루가 얼굴에 튀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니, 그 짧은 순간에 아홉 명 모두가 나를 완전히 포위한 게 보였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 등 뒤는 벽이었고, 사방은 여자들이었고, 발밑엔 부서진 침대 잔해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있나, 폭군.”
뿔 달린 여자가 씹어뱉듯 말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이대로 죽으면 두 번째 죽음인가. 억울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이번엔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죽는 거잖아. 적어도 참치마요는 내 선택이었는데, 이건 남의 죄를 뒤집어쓰고 가는 거잖아.
그 순간, 문득 게임 시나리오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마왕 유서린 초반 루트, 부하들이 처음으로 반란을 도모했다가 실패하는 이벤트.
실패였다. 성공이 아니라.
그 말은,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뭔가 반전이 벌어져야 정상이라는 뜻이었다. 시나리오대로라면, 이 방에서 나는 죽지 않아야 했다.
대체 뭐가.
머릿속으로 그 이벤트의 전개를 다시 더듬어봤다. 분명 뭔가 있었다. 대사 한 줄, 아이템 하나, 그것도 아니면 타이밍 하나. 게임 화면 속에서 스킵 버튼을 누르며 넘겼던 그 장면들이, 지금은 내 목숨줄이었다.
검 아홉 개가 동시에 나를 향했다.
생각할 시간은 이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