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폭군 마왕의 도주극

4화

다은은 마탑 하녀들 중에서도 가장 말단이었다. 나이는 열아홉이라고 했다. 하급 서큐버스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처음엔 그냥 겁 많은 인간 하녀인가 싶었는데, 마력을 살짝 감지해보니 서큐버스 특유의 파장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그것도 아주 낮은 등급의. 서큐버스라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뭔가 화려하고 매혹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던데, 다은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어깨를 웅크리고 다니는 게 습관이 된 듯했고, 옷도 다른 하녀들보다 한 치수 큰 걸 입고 있어서 헐렁했다. 마력도 거의 인간 수준이라, 마탑 안에서는 있어도 없는 존재처럼 취급받는 모양이었다. “……마력이 부족하시네.” 어느 날 아침 식사를 나르던 다은에게 그렇게 말을 걸었더니, 여자가 트레이를 놓칠 뻔했다. 접시가 살짝 기울어지면서 수프가 그릉, 소리를 내며 그릇 벽을 넘실거렸다. “그, 그걸 어떻게 아셔서.” “느껴지니까.” 짧게 답했다. 다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는 그 반응이 좀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마왕이 자기 마력 수준을 언급했다는 게 그렇게 무서운 일인가. 뭐, 이 세계관에서 서큐버스가 마력이 낮다는 건 종족 특성상 치명적인 약점일 수도 있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포기를 선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요리를 배우기로 했다. 계기는 단순했다. 방관자로 지내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오히려 뭔가 새로운 걸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국정 운영에는 손을 놓았지만, 그렇다고 하루 종일 창밖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마왕성 창밖 풍경이 아무리 절경이라도, 매일 보면 질리는 건 인간이나 마왕이나 똑같았다. 박준서였을 때는 요리라고 해봐야 라면 끓이는 게 최고 난이도였는데, 이상하게 이 몸으로는 뭔가 손끝이 야무진 느낌이 있었다. 유서린의 신체 능력이 요리에도 영향을 미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저한테 요리를, 왜 배우려고 하십니까?” 다은이 조심스레 물었다. 마탑 주방 한켠, 하녀들이 쓰는 작은 조리실에서였다. 좁고 낡은 공간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협소함이 편안했다. 넓은 마왕의 집무실보다 오히려 이런 데가 숨쉬기 편하다니, 참 아이러니했다. “심심해서.” 사실 그대로 답했다. 다은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지만, 마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는지 결국 앞치마를 두르고 재료를 꺼냈다. 앞치마 끈을 매는 손이 살짝 떨렸다. “이, 이 야채는 이렇게 써셔야 하는데.” 다은이 시범을 보였다. 손놀림이 제법 익숙했다. 하급이라도 서큐버스라는 종족 특성인지, 손끝이 야무졌다. 칼이 도마 위에서 규칙적으로 탁, 탁, 탁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묘하게 듣기 좋았다. 나는 그 옆에서 어설프게 칼질을 따라했다. 도마 위 당근이 삐뚤빼뚤 잘려나갔다. 정사각형을 만들려던 게 마름모, 아니 그냥 조각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하면 손 다치세요.” 다은이 다급하게 내 손을 잡았다. 순간 그 손이 생각보다 따뜻하다는 걸 느꼈다. 하녀 일이 고단한지 손끝은 조금 거칠었지만, 손바닥의 온기는 확실히 사람의 것이었다. “……괜찮아.” 짧게 답했지만, 손을 놓지는 않았다. 다은도 놓지 않았다. 둘 다 서로의 손을 잡은 채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조리실 안에는 끓고 있는 육수 냄비의 보글보글하는 소리만 가득했다. “……죄송합니다!” 다은이 화들짝 손을 뗐다. 얼굴이 새빨갰다.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오른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왜 사과해.” “마, 마왕님 몸에 함부로 손을 대서.” “상관없어.” 다은이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마 이해가 안 되는 게 당연했을 것이다. 게임 속 유서린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하녀를 벌하는 게 정상이었으니까. 손목이라도 붙잡혔다면 그 자리에서 마력을 흩뿌려 겁을 줬을 인물이었으니. 근데 나는 박준서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냥, 요리를 배우는 게 좋았다. 이유를 더 캐물으면 나 자신도 곤란해질 것 같아서, 그냥 그렇게 정리했다. 그날 이후로 며칠에 한 번씩, 다은에게 요리를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왜 이렇게 요리에 집착하냐고 물으면 딱히 명확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뭔가 해야 할 것 같았고, 그게 요리였다. 처음에는 칼질도 서툴렀지만, 회차가 반복될수록 채소를 써는 모양새가 조금씩 균일해졌다. 다은도 처음에는 신기하다는 듯 보다가, 나중엔 아예 “이렇게 하시면 안 돼요” 하면서 잔소리를 늘어놓는 여유까지 부렸다. 사실은 조금 더 계산적인 이유도 있었다. 평민으로 위장해 도주하려면, 최소한 밥벌이가 될 만한 기술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검을 쓰는 것도 아니고 마법을 쓰는 것도 아니면, 요리라도 팔 수 있어야 어디서든 밥값은 벌지 않겠나 싶었다. 도망친 마왕이 뒷골목 식당에서 국을 끓이며 살아간다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방관자로 지내기로 했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여전히 예속이라는 결말을 피할 방법을 찾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포기가 정말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는 걸, 나는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마왕님은, 요리를 배워서 뭘 하시려는 건가요?” 어느 날 다은이 물었다.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손에 쥔 나무 주걱을 만지작거리면서, 표정에는 아무런 계산이 없었다. “……비상용.” 애매하게 답했다. 다은은 더 캐묻지 않았다. 그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 담백한 반응이 오히려 고마웠다. “이거 한번 맛보실래요?” 다은이 방금 완성한 요리를 조금 떠서 내밀었다. 소스가 자작한 고기 요리였다. 은은한 향신료 냄새가 코를 스쳤다. 나는 그걸 받아먹었다. 맵고 짜고, 그러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맛이었다. 어디서 먹어본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 그런 애매한 그리움이 혀끝에 감돌았다. “……맛있네.” “진짜요?” 다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눈이 살짝 휘어지고, 입꼬리가 위로 쭉 올라갔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뭔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이 아이는 이런 사소한 칭찬 한마디에도 이렇게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하지만 그 온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은이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마왕님. 요즘 좀 이상해지신 것 같아요.” “뭐가.” “원래는, 이렇게 안 웃으셨잖아요.” 다은의 말에 나는 순간 말이 막혔다. 손에 쥐고 있던 주걱을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 “……전에는 어땠는데.” “그건, 제가 말씀드릴 게 아닌 것 같아서.” 다은이 시선을 피했다. 뭔가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는 눈치였다. 손끝이 조리대 위 밀가루 자국을 괜히 문지르고 있었다. 나는 그 대답을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이 몸의 진짜 유서린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다들 두려워하고, 다들 피하고, 그러면서도 아무도 정확히 말해주지 않는,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도, 나는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물어봤다가 듣게 될 대답이, 어쩐지 지금 이 온기를 다 부숴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다은은 다시 요리에 집중하는 척 시선을 돌렸지만, 그 눈빛에는 뭔가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두려움 같기도 했고, 안타까움 같기도 했고, 어쩌면 둘 다인 것 같기도 했다. 그게 뭔지, 나는 그때까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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