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고백 패배자 동맹

4화

며칠이 지나도록 소이와 하준은 정말로 예전처럼 나를 불러냈고, 나는 그때마다 웃는 얼굴로 자리에 앉으면서도 속으로는 매번 다른 계산을 해야 했다. 어디에 앉아야 두 사람의 다정함을 덜 볼 수 있을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어색하지 않을지, 언제쯤 자리를 뜨는 게 자연스러울지를 따지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소이가 웃으며 하준의 어깨를 툭 치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고, 컵을 닦던 손에 괜히 더 힘을 주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저 손님을 응대하는 알바생인 척, 나는 나 자신에게 몇 번이나 다짐을 반복해야 했다. 괜찮아. 나는 그냥 친구니까. 그거면 충분해. 그렇게 되뇌면 될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반복할수록 마음 한구석이 더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하는 물음이 떠오르는 순간 나는 서둘러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으러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해보면 나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봄, 소이의 전학 첫날 비를 맞고 있던 그 애에게 우산을 내민 건 나였지만, 그날 이후 먼저 말을 걸고 계속 곁에 있어준 쪽은 소이였다. 평소처럼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다면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관계였고, 소이가 계속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가까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내가 어떻게 먼저 다가가는 법을 배웠겠는가, 하는 생각이 스치자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소이와의 관계에서만 그런 게 아니었다. 하준과도, 지안과도, 나는 언제나 상대가 먼저 다가와 준 뒤에야 마음을 여는 쪽이었다. 그러니 지금 이 감정도, 소이를 향한 이 마음도, 결국 내가 먼저 시작한 게 아니라 그 애가 다가와 준 자리에 조용히 자리 잡은 감정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픈 걸까. 그날도 카페 마감 시간에 가까워질 무렵, 손님이 뜸해지고 창밖으로 노을이 붉게 번지던 시각이었다. 나는 카운터에 기대어 오늘 매출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들자 처음 보는 여학생이 들어왔다. 짧게 자른 머리에 육상부 점퍼를 걸친, 목소리부터 활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강도윤! 나 오다은이야, 기억나?"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낯선 이름과 낯익은 얼굴 사이에서 기억을 더듬는 동안,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성큼성큼 카운터로 다가왔다. 그러다 곧 기억이 떠올랐다. 몇 주 전 학교 뒤 벤치에서, 그녀가 짝사랑하던 육상부 선배 최우진에게 고백을 준비하며 조언을 구했던 일이 있었다. '이런 말 하면 이상할까?' 몇 번이나 되묻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쳐 지나갔고, 나는 그저 솔직하게 말하는 게 최선이라고 답했을 뿐이었다. 그때는 별 뜻 없이 건넨 말이었는데, 지금 이렇게 다시 마주하니 그 말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을지 걱정이 앞섰다. "어, 다은 선배… 아니 후배님이었죠?" 나는 어색하게 인사했고, 다은은 카운터 앞에 털썩 앉으며 큰 소리로 웃었는데, 그 웃음 뒤에 숨은 씁쓸함을 나는 곧바로 알아챘다. 웃음소리가 지나치게 크고, 지나치게 길었다. "완전 망했어. 완전, 완전 망했다고." 그녀는 두 팔을 테이블에 대고 얼굴을 파묻으며 신음했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나는 얼른 물잔을 채워 그녀 앞에 놓았지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그저 서 있기만 했다. "우진 선배, 전 여자친구랑 다시 사귄대. 내가 고백하기 하루 전에." 하아, 하는 짧은 탄식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 앞에 물을 놓았고, 다은은 고개를 들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네가 조언해준 대로 솔직하게 말했는데, 솔직한 것도 소용이 없더라. 웃기지 않아?" 그 물음에 나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시선을 피했는데, 그 침묵이 오히려 다은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든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를 원망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왠지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뭐라고 조언을 했던 걸까. 솔직함이 언제나 답이라고 말했던 게, 정말 맞는 말이었을까. 내 마음도 다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솔직하게 마음을 전한다고 해서 소이의 마음이 나에게 돌아오는 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솔직해질수록 나는 더 초라해지는 쪽이었다. 마침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지안이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서 몸을 돌리며 말을 건넸다.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나도 비슷한 처지야." 다은이 놀란 눈으로 지안을 쳐다봤다. 지안은 특유의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는데, 자세한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에 담긴 씁쓸함만은 다은과 닮아 있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서로의 사정을 나누기 시작했고,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마치 오래 알던 사람들처럼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는 그 대화를 지켜보며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는데, 어쩐지 이곳이 나만의 도피처가 아니라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자리가 되어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 혼자만 이렇게 마음을 앓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카페 문이 다시 열리며 이번엔 하준이 혼자 들어섰는데, 평소와 달리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소이 없이 하준만 혼자 온 것도 이상했고, 그의 걸음걸이가 평소보다 빠르고 무겁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도윤아, 잠깐 얘기 좀 하자."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고, 나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소이는 왜 같이 오지 않았는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짐작할 수 없어서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혹시… 눈치챈 걸까. 그럴 리가. 나는 티 하나 내지 않았는데. 아니, 정말 그랬던가. 지안과 다은은 대화를 멈추고 우리를 번갈아 쳐다봤고,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앞치마를 벗으며 하준을 따라 카페 밖으로 나섰다. 앞치마를 벗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저녁 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는데, 그건 계절 탓이 아니라 하준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한동안 말을 고르다가, 마침내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요즘 너, 좀 이상한 거 알아?"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숨이 막히는 걸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하필 지금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나는 그저 표정을 지우려 애쓸 뿐이었다.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준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정말 알아챈 건지, 아니면 다른 걸 눈치챈 건지 알 수 없어서 나는 그저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아니, 무슨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걸까. 가로등 불빛 아래, 하준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고, 나는 그 굳은 얼굴 너머로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