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고백 패배자 동맹

5화

"이상하다니, 뭐가." 나는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되물었지만, 하준의 시선은 이미 나의 표정 하나하나를 읽어내려는 듯 집요하게 머물러 있었다. 저녁 바람이 골목 사이로 스치며 가로등 불빛이 흔들렸고, 나는 그 짧은 흔들림 속에서도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카페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커피 향과 골목 어귀에서 불어오는 저녁 공기가 뒤섞여 코끝을 스쳤는데, 그 냄새마저도 이 순간을 더 선명하게 각인시키는 것 같아 나는 애꿎은 앞치마 끝만 만지작거렸다. "소이랑 있을 때, 너 계속 웃고 있는데 눈은 안 웃어." 하준이 팔짱을 풀며 나를 정면으로 마주 봤다. "처음엔 그냥 원래 그런 성격인가 했는데, 요즘 보니까 아니더라고. 특히 나랑 소이가 스킨십하거나 그럴 때, 네가 슬쩍 시선 피하는 거 몇 번이나 봤어." 그의 말투에는 비난보다는 걱정이 더 짙게 묻어 있었지만, 나는 그 걱정이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들었다. 걱정이라는 말로 포장된 관찰이, 그동안 내가 숨기려 애썼던 균열을 이미 다 훑고 지나갔다는 뜻이었으니까. "그건…" 나는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떨궜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처럼 쿵쿵거렸고, 입술이 바짝 말라 몇 번이나 침을 삼켜야 했다.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간단한 부정 하나가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 건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중학교 2학년, 처음 하준과 같은 반이 되던 날, 그가 무심하게 건넸던 말 한마디가 떠올랐다. 야, 너 이름이 뭐냐. 별거 아닌 그 인사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건, 그날을 계기로 하준과 가까운 친구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친구로 지내는 것만으로도 편하고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는데, 하준이 소이와 가까워진 뒤부터는 달라졌다. 소이를 향한 마음을 감춘 채 아무렇지 않은 친구 역할을 해야 할 때마다 조금씩 버거워졌고, 언제부터 그 부담이 이토록 커졌는지 나조차 명확한 경계를 찾을 수 없었다. "도윤아." 하준이 한 걸음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췄다. "너, 소이 좋아하냐." 그 순간 세상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골목의 소음도, 가로등 불빛도, 심지어 내 숨소리까지도 모두 정지된 듯한 착각 속에서 나는 그저 하준의 눈을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부정해야 하는데. 나는 소이를 좋아하지 않아.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그 말은 결국 진실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일 뿐이었다. 소이를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순간, 하준과의 우정도 소이와의 관계도 전부 무너질 것만 같았다. 세 사람 사이에 간신히 유지되고 있던 균형을 내 마음 하나로 깨뜨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손끝이 저려왔다.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5년이었다. 5년 동안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적 없는 그 마음이, 하필이면 지금, 하준의 앞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들킬 위기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목이 타 들어가는 걸 느끼며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니야." 목소리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떨리고 있었다. 하준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진짜야?" 그가 재차 물었을 때, 나는 그의 눈빛에서 아직 완전한 확신이 아니라 반쯤의 의심과 반쯤의 불안이 섞여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건 이미 그가 뭔가를 눈치챘다는 뜻이었고, 내가 지금 뭐라고 대답하든 그 의심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골목의 가로등 불빛만 애꿎게 흔들렸다. 나는 그 정적 속에서 하준의 숨소리마저 셀 수 있을 것 같았고, 그 사실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여기서, 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정작 답은 나오지 않았다. "만약에." 하준이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가 조금 더 가라앉아 있었다. "만약에 그런 거라면, 나한테 말해줬으면 좋겠어. 나 너 친구잖아. 이렇게 몰래 힘들어하는 거 보는 것보다, 차라리 아는 게 나아." 그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그 진심이 오히려 나를 더 궁지로 몰아넣었다. 친구라서, 그래서 더 말할 수 없는 거라고 나는 속으로 되받아쳤다. 친구라는 이름이 이렇게 무거운 족쇄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하준과 가까워졌을 때의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친구니까 괜찮을 거야. 옛날에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던 기억이 났다. 소이가 하준의 옆자리에 처음 앉던 날, 나는 웃으며 둘을 축하해줬고, 그날 밤 혼자 방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마나 오랫동안 숨을 몰아쉬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나는 아니라고 말했고, 그 말이 진짜가 되기를 바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다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윤아, 마감 시간 다 됐는데 뭐 해!" 밝은 목소리가 무거운 공기를 순간적으로 갈랐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얼른 몸을 돌렸다. "들어가야 해서." 나는 하준의 시선을 피하며 서둘러 카페로 향했고, 뒤에서 하준이 뭐라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나는 듣지 않은 척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등 뒤로 그의 시선이 계속 따라붙는 것 같아, 문을 닫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지안과 다은이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고,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쏟아졌다. "무슨 얘기였어?" 다은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저으며 앞치마를 다시 매는 척 카운터로 향했다. 손이 자꾸 헛돌아 앞치마 끈을 두 번이나 다시 묶어야 했다. "별거 아니야."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목소리 끝이 살짝 갈라지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다은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신의 휴대폰을 들여다봤지만, 지안의 눈빛만은 다른 두 사람과 달랐는데, 그녀는 이미 뭔가를 짐작한 얼굴로 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묻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애써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정리대 위 컵을 하나씩 닦기 시작했다. 컵을 닦는 손이 유난히 느리게 움직였다. 물기를 닦아내는 척, 나는 그저 시간을 벌고 있었다. 지안이 뭔가 말을 건네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을 때, 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끼고 있었다. 창밖으로 하준의 뒷모습이 골목 어귀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그는 완전히 확신하지 못한 채로 돌아갔지만, 그 의심의 씨앗은 이미 뿌려진 뒤였고, 나는 그 씨앗이 언제 어떻게 자라날지 몰라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걸 느끼며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유리창 너머, 흔들리는 가로등 불빛 아래로 하준의 실루엣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5년 동안 지켜온 마음이, 단 몇 마디의 질문으로 이렇게 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흔들림 뒤에, 이제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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