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공 3단, 두뇌는 만렙

1화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한서준은 그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서울 원룸의 형광등이 아니었다. 나무로 짠 서까래가 촘촘히 얹혀 있었고, 그 틈으로 희끄무레한 새벽빛이 스며들었다. '술을 얼마나 마신 거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팔이 가벼웠다. 지나치게 가벼웠다. 마치 뼈 속이 텅 빈 것처럼, 힘을 주는 방식조차 낯설었다. 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갔을 때, 그는 그대로 굳었다. 손이 작았다. 손가락이 얇았다. 마디마디에 굳은살 하나 없는, 소년의 손이었다. '이게 뭐지.' 그는 손을 몇 번이나 뒤집어 보았다.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서른둘의 한서준, 서울대 금융학과를 나와 증권사에서 십 년을 버틴 그의 손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매일 키보드를 두드리며 굳어진 손끝, 술잔을 쥐던 손아귀의 감각이 이 손에는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방 안이 빙그르 돌았다. 낮은 서랍장, 놋대야, 벽에 걸린 낡은 검 한 자루. 어느 사극 세트장에라도 온 것 같았다. 벽지 대신 흙벽이었고, 창문에는 유리 대신 얇은 창호지가 발라져 있었다. '꿈이다.' 그는 그렇게 되뇌었다. 그러나 볼을 두 번 꼬집었을 때 느껴진 통증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손끝에 남은 얼얼함마저 생생해서, 이것이 그저 스쳐 지나갈 감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도련님, 일어나셨어요?" 열네댓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놋대야를 들고 들어오다 그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도련님, 안색이... 괜찮으세요?" 그녀의 이름은 소은이라 불렸다. 나중에 알았다. 한서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목소리를 어떻게 내야 할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성대의 진동조차 이 몸에서는 낯설게 느껴졌다. "물... 물 좀." 겨우 내뱉은 목소리는 낯설었다. 앳되고 가늘었다. 자신의 것이라 여기기엔 지나치게 맑은 음색이었다. 소은이 서둘러 물그릇을 대접했다. 손이 떨리는 것을 보니, 지난 며칠간 이 방에서 무엇을 겪었는지 짐작이 갔다. 그는 그것을 받아 마시며 자신의 상황을 정리하려 애썼다. 물맛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정수기 물도 아니고, 편의점 생수도 아니었다. 우물에서 길어 올린 듯한, 흙내 섞인 물이었다. '전생인가.'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술 마시고 자다가 다른 세계, 다른 몸으로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웹소설에서 수백 번은 본 설정이었다. 다만 그것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뿐이다. 회사 야근 중 짬짬이 읽던 그런 소설들이, 실제로 자신의 삶이 되어버릴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이 몸의 원래 주인은.' 그는 그 물음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알고 싶지 않은 답이 이미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제가... 며칠이나 이렇게 있었지?" 그가 물었다. "사흘째예요, 도련님. 넘어지신 뒤로 계속 열이 오르셔서...." 소은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녀의 눈가에 붉은 기가 남아 있었다. 밤새 울었거나, 밤새 간호했거나, 혹은 둘 다였을 것이다. 한서준은 자신의 몸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이 몸이 넘어졌고, 열을 앓았고, 사흘 동안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가 들어와 앉아 있었다. '사흘.' 그는 그 숫자를 곱씹었다. 서울에서의 그는, 사흘이나 자리를 비웠다면 회사에서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몸에는 그런 걱정이 필요 없었다. 다른 걱정거리가 산더미였다. 방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여인이었다. "서준아!" 그녀는 방 안으로 뛰어들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머니..." 한서준의 입에서 그 말이 저절로 나왔다. 낯선 몸의 감각이 낯선 말을 뱉게 만들었다.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입이 먼저 움직인 것 같았다. 여인, 임씨는 눈물부터 쏟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지난 사흘의 초조함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눈 밑이 거뭇했고, 입술은 갈라져 있었다. "괜찮으냐. 어디 아픈 데는." 그녀가 그의 얼굴 이곳저곳을 살폈다. 손끝으로 이마를 짚고, 뺨을 감싸고, 목덜미까지 훑었다. 한서준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고개를 저었다. 이 여인이 진짜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물은 진짜였고, 그 진짜 눈물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었다. 그때 그의 뒤로 작은 인기척이 따라붙었다.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오라버니, 이제 안 아파?" 아이는 침상 끝에 매달리듯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붉게 부어 있었다. 오라비가 사흘 내내 눈을 뜨지 않는 것을 지켜본 아이의 얼굴이었다. "이 아이가 한서영... 내 동생인가." 그는 그렇게 짐작했다. 이 몸의 기억 파편이 조금씩 떠올랐다. 이름, 나이, 관계. 마치 누군가가 흐릿한 사진첩을 펼쳐 보이는 것 같았다. 서영이라는 이름이 떠오르는 순간, 함께 마당에서 술래잡기를 하던 흐릿한 장면 한 조각도 따라왔다. 그것이 이 몸의 기억인지, 아니면 자신의 뇌가 만들어낸 착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서준은 서영의 머리를 무심코 쓰다듬었다. 손끝에서 아이가 웃는 소리가 났다. 그 온기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나쁘지 않았다. 서울에서 그는 이런 온기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부모는 일찍 돌아가셨고, 형제는 없었다. 십 년을 오로지 숫자와 실적으로만 채운 삶이었다. 하지만 그 온기와는 별개로, 그의 머릿속은 차갑게 굴러가고 있었다. '이 몸, 이 세계, 이 신분. 파악해야 한다.' 그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십 년의 증권가 생활이 그에게 가르친 것은 하나였다. 정보 없이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마라. '모르는 시장에 뛰어드는 놈은 반드시 죽는다.' 그의 상사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그 말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여기가 어떤 시장인지, 자신이 어떤 자리에 앉아 있는지조차 모르는 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임씨가 물을 가져오라며 소은을 내보낸 뒤,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어머니, 제가... 넘어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임씨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방금까지의 안도가 걷히고, 그 아래 숨겨져 있던 근심이 드러났다. "내력을 끌어올리다 그리되었다지 않니. 태강이 그 아이가..."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서준은 그 이름을 마음에 새겼다. 한태강. '이 몸의 원래 주인은 누군가에게 다쳤다.' 그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사고가 아닐 것이라는 예감이 스쳤다. 어머니라는 사람이 그 이름을 꺼낼 때 보인 표정, 그것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었다. 뭔가를 삼키고 있는 표정이었다. "태강이... 형제입니까?" 그가 다시 물었다. 임씨는 잠시 대답을 미뤘다. 그러다 겨우 입을 열었다. "네 사촌이다. 큰아버지댁 장자. 그 얘긴... 나중에 하자. 지금은 몸부터 추스려야지." 그녀는 화제를 급히 접었다. 아들의 몸이 이제 겨우 열이 내렸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충분히 조심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한서준은 더 캐묻지 않았다. 지금 서두르면 오히려 의심을 살 뿐이었다. '급할 것 없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았다. 시간은 있었다. 적어도, 아직은 있을 것이라 믿었다. 임씨는 한참을 그의 손을 쥐고 있다가, 서영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서야 한서준은 비로소 숨을 크게 내쉬었다. +++ 그날 저녁, 그는 홀로 방에 남아 자신의 단전 자리를 더듬어 보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씨 하나 남지 않은 재처럼, 텅 비어 있었다. 배꼽 아래 어딘가, 이 몸의 기억이 말해주는 그 자리를 몇 번이나 눌러보았지만 어떤 온기도, 어떤 진동도 돌아오지 않았다. '파괴됐다.' 그는 그렇게 직감했다. 내공이라는 것이 이 세계의 힘이라면, 이 몸은 그 힘을 완전히 잃었다. 낮 동안 소은이 슬쩍 흘린 말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한씨세가, 무당의 후예, 사문의 이름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세계에서 내공을 잃은 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짐작은 갔다. 칼 없는 무인, 돈 없는 상인과 다를 바 없었다. '무공을 잃은 무가의 자제.' 그는 그 단어를 곱씹었다. 증권가에서 실적을 잃은 트레이더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그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이곳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창밖으로 낮게 깔린 능선이 보였다. 그 위로 별 하나가 유독 밝게 떠 있었다. 서울의 밤하늘에서는 본 적 없는 밝기였다. 매연도, 가로등의 불빛도 없는 하늘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그는 그렇게 자문하며, 아직 낯선 자신의 두 손을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보았다. 엄지, 검지, 중지. 서른둘의 감각으로 열네댓 살의 몸을 움직이는 일은 마치 남의 옷을 억지로 껴입은 것 같았다. 걸음걸이도, 손짓도, 심지어 숨 쉬는 리듬조차 낯설었다. 그러나 낯섦보다 더 무거운 것은 따로 있었다. 태강이라는 이름을 꺼낼 때 임씨의 얼굴에 스친 표정, 그 표정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단순한 사고였다면 그런 표정을 지을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이 몸을 해치려 했다.' 그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지금은 자신이 앉아 있었다. 방 안은 고요했다. 놋대야에 담긴 물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그는 그 소리를 들으며, 이 낯선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씩 짚어보기 시작했다. 이름, 신분, 가문, 그리고 자신을 다치게 한 이가 누구인지. 그 모든 것을 알기 전까지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것이 십 년의 증권가 생활이 그에게 남긴 유일한 교훈이었다. 밤이 깊었다. 별은 여전히 밝게 떠 있었지만, 그 별을 올려다보는 두 눈에는 이제 낯선 몸에 대한 당혹보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계산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문밖에서, 낮에는 듣지 못했던 발소리가 아주 잠깐 멈췄다가 다시 멀어졌다. 한서준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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