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공 3단, 두뇌는 만렙

2화

이튿날 아침, 한서준은 사랑채로 불려갔다. 큰집 어른들에게 인사를 올리라는 임씨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씨는 새벽부터 그의 옷깃을 매만지며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말은 짧게 하고, 눈은 내리고. 큰아버님 앞에서는 절대 먼저 입을 열지 말거라." 한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직 이 세계의 예법도, 걸음걸이도 몸에 붙지 않았다. 무릎을 굽히는 각도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했고,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조차 몸이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따라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임씨의 얼굴에는 이미 불안이 짙게 배어 있었고, 그 불안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서준은 알고 있었다. 사랑채로 가는 길, 담장을 따라 걷는 동안 하인들 몇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시선이 서준의 뒤통수에 한 번씩 머물렀다가 재빨리 거두어졌다. 동정도 아니었고 호기심도 아니었다. 그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는 계산이 담긴 눈빛이었다. 사랑채 마당에는 이미 몇몇이 모여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열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어깨가 벌써 벌어졌고, 걸음마다 여유가 흘렀다. 허리춤에는 목검 대신 진검을 찬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이 소년이 세가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이구, 폐물 나셨구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한태강이었다. 그 목소리에는 놀라움도, 반가움도 없었다. 마치 예정된 대사를 읽는 듬한 무심함이었다. 서준은 그 무심함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것이라 생각했다. "내력을 끌어올리다 단전을 아예 태워 먹었다며. 이제 무공이라곤 손톱만큼도 못 쓰겠지." 옆에 선 다른 소년, 한태걸이 낄낄거리며 거들었다. 한태걸은 한태강보다 한 뼘쯤 작았고, 말투에도 그만큼의 조심스러움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조심스러움은 서준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형의 눈치를 보는 조심스러움일 뿐이었다. 한서준은 즉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태도를 살폈다. '말투에 죄책감이 없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자신들이 이 몸을 저렇게 만든 당사자일 가능성이 높은데도, 목소리에 미안함 한 톨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그것이 서준에게는 이상하게 명확한 정보로 다가왔다. 이 자리에서 힘의 서열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 누가 누구를 밟아도 되는지가 저 웃음소리 하나로 다 드러났다. "인사도 안 하는 걸 보니 예의도 잊었나 보구나." 한태강이 턱을 치켜세웠다. 주변에 서 있던 어른들 중 몇몇이 그 말에 낮게 웃었다. 그것이 서준을 더 아프게 만들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웃음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작음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들렸다. 큰 소리로 비웃었다면 차라리 화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 낮은 웃음은 화조차 낼 자격이 없다는 걸 알려주는 웃음이었다. "큰아버님을 뵙습니다." 서준은 짧게 예를 갖췄다.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굽히면서도 시선의 방향을 놓치지 않았다. 전생, 임원 승진을 앞두고 상사 앞에서 고개를 숙이던 순간들이 몸의 감각으로 되살아났다. 그때도 굴욕은 있었지만, 굴욕에 잠식되면 다음 수를 놓치게 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가주 한정호가 그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눈빛에는 관심도, 애정도 없었다. 그저 값이 나가지 않는 물건을 확인하듯 스쳐 지나가는 시선이었다. "몸이나 추스르거라." 딱 그 한 마디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시선을 돌렸다. 그것으로 인사는 끝났다. 아무도 서준의 안부를 더 묻지 않았다. 한태강도, 한태걸도, 그 자리에 있던 어른들 누구도 다시 그를 향해 말을 걸지 않았다. 마당의 공기는 이미 서준을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한서준은 걸음을 옮기며 조금씩 이 세계의 좌표를 그려나갔다. '한씨세가. 내공 십 단계 체제. 이 몸은 삼 단까지 올랐다가 주화입마로 완전히 파괴됐다.' 그는 그렇게 정리했다. 어젯밤 어머니에게 들은 조각과, 몸에 남은 흐릿한 기억이 조금씩 맞춰졌다. 세가의 체계는 단순하지 않았다. 본가와 방계가 나뉘어 있었고, 방계 안에서도 몇 개의 가지가 서열을 두고 갈라져 있었다. 한태강의 가지는 본가 다음으로 힘이 셌고, 서준이 속한 가지는 그 반대편, 거의 밑바닥에 걸려 있었다. 그 서열은 단순히 예의범절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재산과 인원, 심지어 하인들의 눈빛까지 결정하는 경계선이었다. 부친 한충식은 팔 년 전에 죽었다. 그 뒤로 이 가지는 세가 안에서 급격히 주변화되었다. 홀로 남은 임씨가 시숙 한광호의 도움에 의지해 겨우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 한광호마저 없었다면, 이 가지는 이미 세가에서 지워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서준은 몸의 기억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고아, 폐물, 그리고 이제는 웃음거리.' 그는 그렇게 자신의 처지를 냉정하게 요약했다. 서울대를 나와 증권사 임원 승진을 노리던 사내가, 이 세계에서는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였다. 그 낙차가 아득했다. 전생에서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시황을 확인하고, 밤 열두 시까지 자료를 읽던 삶이었다. 아무도 대신 채워주지 않는 삶이었기에 스스로 채워야 했고, 그 방식이 그를 어느 정도의 자리까지 밀어 올렸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축적이 무의미했다. 여기서는 서울대 졸업장도, 십 년간의 실적도 통용되지 않았다. 통용되는 것은 오직 내공의 단계였고, 그는 그 단계에서 완전히 지워진 존재였다. 방으로 돌아온 서준을 서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라버니, 큰집 갔다 왔어?" 아이가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태강이 형아가 또 뭐라 했지? 오라버니 얼굴 보면 알아." 서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일곱 살 아이의 눈치가 어른들의 눈치보다 빠르다는 것이 서준에게는 조금 서글프게 느껴졌다. 이 아이는 이미 이 집안의 공기를 읽는 법을 배워버린 것이다. 배우지 않아도 되었을 나이에. 한서준은 잠시 말이 없다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별일 없었어." 그는 그렇게 답했다.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일곱 살 아이에게 굳이 모멸을 전할 필요는 없었다. 서영은 그 말을 곧이 받아들이지 않는 듯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오라버니의 손을 잡고 마당 끝까지 따라와서는, 아무 말 없이 그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그 작은 힘이 서준에게는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날 밤, 그는 홀로 앉아 마음을 정리했다. 방 안의 등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 줄어들었다. 그는 그 그림자를 바라보며 오늘 낮의 장면들을 하나씩 되짚었다. 한태강의 웃음, 한태걸의 거드름, 가주의 무심한 한 마디. 그 모든 것이 정보였다. 감정으로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분석해야 할 자료였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전생에서 그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 서울대에 들어갔고, 증권가에서 십 년을 버텼다. 배경도, 인맥도 없었다. 오직 정보를 남보다 빨리 읽고, 판단을 남보다 빨리 내리는 것으로 자리를 지켰다. 남들이 소문에 흔들릴 때 그는 숫자를 봤고, 남들이 감정적으로 매도할 때 그는 흐름을 읽었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무기였다. '이 세계도 다르지 않다.' 그는 그렇게 되새겼다. 내공이 없다면 다른 것으로 채워야 했다. 세가의 서열, 인물들의 관계, 누가 누구에게 빚을 지고 있는지, 누가 누구를 두려워하는지. 그것들을 낱낱이 읽어낼 수 있다면, 내공이 없어도 판을 흔들 여지가 생길 것이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적 남겼다는 말을 임씨가 종종 되풀이했다. 서준의 기억 속에도 그 말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힘없는 자가 살아남는 법은, 힘 있는 자보다 먼저 판을 읽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이었다고 했다. 그는 그 말을 마음에 새겼다. 얼굴도 온전히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였지만, 그 말 하나만은 몸속 깊은 곳에 새겨진 듯 선명했다. 어쩌면 이 몸의 주인이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문장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서준은 생각했다. '복수는 나중이다. 지금은 살아남는 것부터.' 그는 그렇게 자신을 다잡았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다른 목소리도 있었다. 한태강의 웃음소리, 가주의 무심한 눈빛, 어른들의 나른한 조롱. 그것들이 그의 안에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다.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하루가 지날수록 조금씩 짙어지는 얼룩처럼. '언젠가는 갚아준다.' 그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그것이 격언처럼 그의 안에 자리를 잡았다. 창밖에서 바람이 스산하게 불었다. 겨울이 멀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마당의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마른 잎 몇 개를 떨어뜨렸고, 그 소리가 방 안까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 겨울보다 먼저, 그의 안에 자리 잡은 냉기가 더 깊었다. 그는 그 냉기를 굳이 몰아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하나의 도구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감정에 잠식되지 않되, 그 감정이 남긴 냉정함만은 남겨두는 것. 그것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등불이 마지막으로 크게 흔들리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방 안은 다시 어둠에 잠겼고, 서준은 그 어둠 속에서 눈을 감지 않았다. 내일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어느 정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다만 그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아직 너무 많은 조각이 부족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