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숨었더니 자매가 쫓아온다

1화

골목은 좁았다. 담벼락 사이로 아침 햇살이 얇게 스며들었다. 벽돌 틈에 낀 이끼 냄새가 났다. 나는 이어폰을 낀 채 그 틈을 지나가고 있었다. 등교 시간, 늘 다니던 길. 발밑에 깔린 보도블록의 개수까지 셀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길이었다. 아무 일도 없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앞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다급한 숨소리. 낮게 억누른 협박. 그리고 여자의 목소리. 나는 걸음을 멈췄다. 이어폰 너머로도 그 소리는 또렷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이 골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게 처음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숨소리에 실린 떨림의 결이 낯설지 않았다. 담벼락 뒤, 좁은 공터에 다섯 명의 남자가 두 여학생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나는 은발을 길게 묶은 여자였다. 다른 하나는 같은 색 머리를 짧게 자른, 더 작은 체구의 여자였다. 둘 다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자매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머리색이 똑같이 은색인 건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조용히 따라오면 다치진 않아." 앞장선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목소리에 여유가 넘쳤다. 사람을 몇 번쯤 위협해본 목소리였다. 은발 포니테일 쪽이 동생을 등 뒤로 감췄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눈빛만은 차분했다. 무섭지 않은 게 아니라 무서움을 삼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키가 큰 남자 하나가 담벼락에 팔을 짚고 서서 여자들의 퇴로를 막았다. 다른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히죽거렸다. 여자애들이 물러설 곳은 없었다. 공터는 삼면이 담이었고 나머지 한 면은 그들이 막고 있었다. 나는 이 상황과 아무 관계도 없었다. 관계없는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 그게 내가 정한 규칙이었다. 남의 문제에 손을 대면 반드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겪어서 알았다. 좋은 마음으로 나섰다가 오히려 내 존재가 드러나고, 그게 더 큰 화를 부르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돌아서면 그만이었다. 발을 뗐다. 그런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동생 쪽 여자애가 나를 봤다. 정확히 나와 눈이 마주쳤다. 도와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겁에 질렸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눈이었다.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눈이 아니라, 이 상황을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눈이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왜 이래. 나는 이어폰을 뺐다. 이어폰 줄이 옷깃에 스치는 소리마저 크게 들렸다. "거기, 뭐 하는 겁니까." 내 목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다섯 개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꽂혔다. 앞장선 남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교복, 가방, 그리고 이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선글라스까지. "뭐야, 넌." "지나가는 사람인데요." "그럼 지나가." "그러려고 했는데." 나는 선글라스 다리를 살짝 올려 썼다. 아침부터 볕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도 벗지 않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다른 이유가 됐다.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신경 쓰이게 만드시네요." 남자 하나가 먼저 달려들었다. 팔을 크게 휘둘렀다. 주먹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나는 몸을 낮추고 그의 손목을 잡아 그대로 비틀었다. 우드득- 뼈가 꺾이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관절이 삐끗하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이, 이 미친놈이—" 두 번째 남자가 발을 뻗었다. 나는 반보 물러서며 그 발을 걷어올렸다. 남자가 뒤로 넘어지며 담벼락에 머리를 부딪쳤다. 텅- 소리가 골목에 낮게 퍼졌다. 남자는 멍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였다. 나머지 셋이 멈칫했다. "뭐, 뭐야 이 자식."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그들을 봤다. 선글라스 너머의 눈은 아무도 볼 수 없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그들을 더 흔들었다.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모르면,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할지도 예측할 수 없으니까. 세 번째 남자가 뒷걸음질 쳤다. 발끝이 돌부리에 걸려 휘청였다. 앞장선 남자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려 했다. 손끝이 재킷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칼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그 손목을 먼저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담벼락에 밀어붙였다. 퍽- 소리가 났다. 남자의 얼굴이 벽에 짓눌리며 일그러졌다. "어, 어어—" "경찰 부르기 전에 가시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이미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아마 근처 건물에서 이 소란을 들은 사람이 있었을 거다. 남은 세 명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친 둘도 절뚝이며 뒤를 따랐다. 골목 끝으로 사라지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나는 그들이 사라진 골목 끝을 잠시 바라봤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방금까지의 소음이 거짓말 같았다. 그리고 뒤를 돌았다. 두 여자애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은발 포니테일 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아직 떨렸다. "저, 저기, 괜찮아? 다친 데 없어?" 동생 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아까와 조금 달라져 있었다. 경계에서 궁금함으로. "이름이라도… 알려줄 수 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등을 돌렸다. "저기요!"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골목을 빠져나오면서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나는 이미 다른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나조차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그 눈빛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게 다였다. ***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지각이었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고, 교실 문 너머로 웅성거림이 새어나왔다. 나는 조용히 뒷문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교실은 시끄러웠다. 누군가 어제 있었던 예능 얘기를 하고, 누군가는 숙제를 베끼고 있었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그랬다. 한도영. 그게 이 학교에서 불리는 내 이름이었다. 진짜 이름은 이재원이었다. 왜 다른 이름을 쓰는지, 그건 나 혼자만 아는 이야기였다. 선글라스도 마찬가지였다. 눈에 유전적인 문제가 있어서 빛에 민감하다고, 그렇게만 설명하면 사람들은 더 묻지 않았다. 담임도, 같은 반 애들도, 그 이상은 궁금해하지 않았다. 진짜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나는 조용히 지내는 게 편했다. 관심받지 않는 게 편했다. 관심을 받는다는 건 누군가의 시선 속에 오래 머문다는 뜻이고, 그건 곧 위험해질 확률이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 골목에서의 일도 그냥 잊으려고 했다. 책상 위에 교과서를 펼쳤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업 시간 내내 선생님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웅웅거렸다. 창밖으로 시선이 자꾸 향했다. 아무것도 없는 하늘인데도. 하루쯤, 그 여자애들 얼굴이 자꾸 떠올랐지만. 특히 그 작은 체구의 여자애가 나를 보던 눈빛이.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무너지지 않던, 이상하게 단단한 눈빛이었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점심시간, 급식판을 앞에 두고도 나는 젓가락을 오래 들지 않았다. 같은 반 애 하나가 옆에 앉으며 물었다. "한도영, 뭐 고민 있어?" "아니." "표정이 왜 그래." "원래 이런 표정이야." 더 묻지 않았다. 다들 그랬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든, 어떤 말을 하든, 깊게 파고들지 않는 게 이 학교에서의 나였다. 나는 그게 편했고, 지금도 편해야 했다. 그런데 자꾸만 그 골목이 떠올랐다. 그날 밤, 나는 그게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잠들었다. 이불을 덮고 눈을 감으면서도, 그 여자애의 시선이 눈앞에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별일 아니야. 그냥 지나가다 도와준 거고, 다시는 마주칠 일 없을 거야. 그렇게 되뇌었다. 그게 얼마나 큰 오산이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방 안의 불을 끄기 직전, 창밖에서 낯선 자동차 엔진 소리가 잠깐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사라졌고, 나는 그것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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