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강서린 시점]
생활지도부실 창밖으로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붉은 빛이 책상 모서리를 타고 흘러내려, 서류철 위에 쌓인 종이들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나는 그 위에 손을 얹은 채, 오늘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되짚었다.
이도윤.
그 이름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손끝이 조금 떨렸다.
나는 그 감정의 정체를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다.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했고, 궁금하다는 말로는 너무 얕았다. 하지만 그것이 시작된 지점만큼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 달 전, 어느 늦은 밤이었다.
나는 잠들지 못한 채 휴대폰을 붙잡고 학교 익명 게시판을 뒤적이고 있었다. 별다른 목적은 없었다. 그저 시간을 죽이고 있었을 뿐. 그러다 우연히 소설 링크 하나를 발견했다.
'눈부신 학원에서 다섯 명의 여자친구와 함께하는 달콤한 나날'.
제목이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손가락을 멈추지 못했다. 궁금했다. 이런 뻔한 제목의 글이 왜 우리 학교 게시판, 그것도 익명 자유게시판에 올라와 있는지.
첫 화를 읽는 순간, 나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소설 속 생활지도위원장 캐릭터. 냉철하고 완벽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외로운 인물. 규칙을 지키는 이유가 오직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였다는 서술을 읽었을 때, 나는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건 나였다.
정확히는,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나의 진짜 모습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희박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몇 번이고 문단을 다시 읽었다. 혹시 내가 잘못 읽은 게 아닐까. 혹시 이건 그냥 우연히 비슷한 성격을 가진 캐릭터가 아닐까.
하지만 아니었다.
세세한 묘사들이 문제였다. 캐릭터가 매일 아침 정확히 7시 40분에 등교해서 정문 앞에 선다는 설정. 그건 내 습관이었다. 캐릭터가 규칙을 어긴 학생에게 벌점을 줄 때마다 속으로는 미안함을 느낀다는 서술. 그것도 내 속마음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작가가 나를 알고 쓴 걸까? 아니면 우연히 겹친 걸까?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눈 밑에 다크서클을 매단 채로 등교하면서도 머릿속엔 오직 그 소설 생각뿐이었다.
나는 작가 프로필을 확인했다. '달빛조각가'. 익명이었다. 프로필 사진도 없었고, 다른 작품도 없었다. 오직 그 소설 하나뿐. 그리고 조회수는 놀라울 정도로 적었다. 열 명도 안 되는 사람만이 이 글을 읽고 있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나를 더 확신하게 만들었다.
작품 속 세세한 묘사들 — 우리 학교의 실제 구조, 급식실 메뉴, 심지어 내가 매일 순찰하는 복도의 위치까지 — 그것들은 우연이라고 보기 힘들 만큼 정확했다. 3층 화장실 창문이 고장 나서 겨울에도 찬 바람이 들어온다는 묘사. 그건 관리실에 신고했지만 아직 고쳐지지 않은 진짜 문제였다.
나는 결국 작가가 우리 학교 학생일 거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조용히 그 존재를 찾기 시작했다.
생활지도위원장이라는 직책은 편리했다. 학생들의 동선을 파악하는 데 정당한 명분이 되어주었으니까. 나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순찰을 돌면서, 조금씩 후보를 좁혀나갔다.
글에 등장하는 표현들, 특정 단어의 사용 습관, 문체의 리듬. 나는 그것들을 국어 시간에 제출된 학생들의 작문과 비교해보기도 했다. 우스운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한 달간의 관찰 끝에, 나는 이도윤이라는 이름에 도달했다.
존재감 없는 남학생. 반에서도 눈에 띄지 않고, 급식 줄에서도 조용히 맨 뒤에 서 있는 아이. 그런데 그의 눈빛에는 뭔가가 있었다. 언제나 무언가를 관찰하고, 기록하려는 눈빛.
나는 그를 몇 번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다.
그가 매점 앞에서 혼자 빵을 사 먹는 모습. 봉지를 뜯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도서관에서 노트북을 펴고 뭔가를 열심히 타이핑하는 모습. 화면을 가리는 각도가 유독 신경 쓰였다.
한번은 그가 도서관 구석 자리에서 노트북 화면을 급하게 닫는 걸 목격했다. 누군가 지나가자 반사적으로 손이 움직였던 것이다. 그 순간의 조급함이, 나에게는 확신으로 다가왔다.
이 애가 달빛조각가다.
그리고 어제, 나는 우연히 은서의 무리가 벌칙 게임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상이 이도윤이라는 것도.
복도에서 스치듯 들은 대화였다. 은서와 그 무리 아이들이 낄낄거리며 뭔가를 계획하고 있었다. "재밌겠다", "그 애 반응 어떨지 궁금하네" 같은 말들이 오갔다.
나는 그걸 막을 수도 있었다. 생활지도위원장으로서, 그 정도 개입은 정당한 명분이 있었다. 다가가서 "무슨 얘기 하고 있어?" 한마디만 던졌어도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막지 않았다.
대신, 그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았다. 그가 무너지는 순간, 나는 개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겁했을까?
아니, 이건 계산이었다. 나는 그가 가장 취약해진 순간에 나타나야 했다. 그래야만, 그의 기억 속에 확실히 자리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계산은 성공했다. 완벽하게.
그가 무리 속에서 곤란해하던 그 표정. 도움을 청할 곳 없이 흔들리던 눈빛. 그 순간 내가 나타나, 그를 그 상황에서 꺼내주었다. 그의 눈에 담긴 안도감.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문제는,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은비, 예령, 다인, 시율.
그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이미 도윤을 주목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 나는 그들이 각자 도윤에게 접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치 짐승들이 하나의 사냥감을 향해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가는 것처럼.
은비의 캠코더. 그녀는 늘 그렇듯 렌즈 뒤에 숨어서 도윤을 관찰하고 있었다. 자신의 진짜 감정을 카메라라는 매개체 없이는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
예령의 과자 상자. 그녀는 도윤의 책상 위에 슬쩍 과자를 올려놓고 사라졌다. 직접 말을 건네는 대신, 물건으로 마음을 전하려는 방식.
다인의 무모한 운동 권유. 체육복 차림으로 도윤을 붙잡고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던 모습. 그 애다운 직진 방식이었다.
시율의 조용한 대화.
특히 시율.
그녀는 도윤과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라고 했다. 복도 끝에서 두 사람이 마주 서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별다른 대사도, 큰 몸짓도 없었지만, 그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달랐다. 오래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편안함.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는 무언가.
그 관계의 깊이는, 내가 한 달간 쌓은 관심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신경 쓰였다. 예상보다 훨씬 더.
가슴 한쪽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 나는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질투라는 단어는 너무 유치했고, 불안이라는 단어는 너무 솔직했다.
이대로 각자 흩어져서 도윤에게 다가간다면, 상황은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질 것이었다. 도윤은 부담을 느끼고 도망칠 수도 있었다. 다섯 명의 시선이 동시에 쏟아지는 상황에서, 그가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면, 우리 다섯 명이 서로 견제하는 사이에 은서 같은 인물이 다시 파고들 틈을 만들어줄 수도 있었다.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명확한 규칙이 필요했다.
다섯 명이 동시에 그를 흔드는 건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좋을 게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그가 직접 선택하게 만드는 것.
다섯 명 중 한 명을.
기한을 정하고, 그 안에서 각자 공정하게 다가갈 기회를 갖게 하는 것.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이라고, 나는 스스로를 설득했다.
물론 그 합리성 뒤에는, 내가 가장 먼저 그에게 다가갔다는 확신이 숨어 있었다. 나는 그의 소설을 가장 먼저 읽었고, 그의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냈고, 그가 무너지던 순간에 가장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 규칙을 제안함으로써, 스스로 유리한 위치에 서려 하고 있었다.
계산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다. 이게 정말 공정한 제안인가. 아니면 내가 이길 확률이 가장 높은 판을 짜고, 그 위에 공정이라는 이름을 덧씌운 것뿐인가.
답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방과 후, 나는 도윤을 생활지도부실 앞에서 붙잡았다.
복도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마지막 종이 울린 지 한 시간이 넘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하교했을 시간이었다. 나는 일부러 그 시간을 택했다. 아무도 우리를 보지 않을 시간.
그의 얼굴에는 하루 종일 쌓인 피로와 혼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눈 밑이 살짝 부어 있었고, 어깨는 평소보다 더 처져 있었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며,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이런 상태의 아이를 붙잡고, 내가 지금 하려는 말을 꺼내는 게 맞는 걸까.
하지만 이미 결심한 일이었다. 물러설 이유를 찾는 것도, 지금 와서는 비겁한 변명이었다.
"이도윤. 시간 좀 있어? 얘기 좀 하자."
내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하게 나왔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계심과 피로가 뒤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서 나는 잠깐, 그가 오늘 겪었을 모든 일들을 떠올렸다. 은비의 카메라, 예령의 과자, 다인의 손짓, 시율과의 대화. 그리고 그 끝에 나.
나는 그를 데리고 생활지도부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는 손이, 평소와 다르게 조금 무거웠다.
창밖 노을이 방 안으로 붉게 스며들고 있었다. 책상 위 서류들이, 벽에 걸린 학교 규칙 안내판이, 모두 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이 공간 전체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준비된 무대처럼 느껴졌다.
나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었다.
이 말을 꺼내는 순간,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도윤과 나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은비와 예령과 다인과 시율,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도윤아." 나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그 순간, 그의 눈이 살짝 커지는 걸 보았다. 존댓말도 아니고, 성을 붙인 것도 아닌, 처음으로 건넨 이름.
"너한테, 제안할 게 있어."
방 안의 공기가, 노을빛과 함께 천천히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