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남작가 삼남의 환골탈태

3화

다음 날 아침, 도현은 저택 서재에 홀로 앉아 있었다. 창밖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지만 그의 시선은 오로지 책상 위에 쌓인 편지 묶음에만 고정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서윤과 주고받았던 지난 몇 년간의 서신들이었다. 낡은 끈으로 묶여 있던 편지 뭉치를 풀어내자 종이 특유의 마른 냄새가 코끝을 스쳤고, 도현은 그 냄새마저도 서윤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사실에 잠시 손을 멈추었다. 한 장, 한 장. 편지를 넘길 때마다 종이가 부딪히는 마른 소리가 서재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고, 그 안에는 그녀가 필요할 때마다 도현에게 부탁하던 온갖 요청들이 빼곡히 적혀 있어 그것을 다시 읽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리는 듯한 불쾌감이 밀려왔다. '이거 좀 대신 처리해줄 수 있어? 너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오늘 시간 괜찮으면 좀 와줄래? 급한 일이 생겼어.' '미안한데 이번에도 부탁 좀 할게, 다음엔 내가 꼭 갚을게.' 편지마다 반복되는 문장들을 훑어내리며 도현은 자신이 그동안 서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뼈저리게 인식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언제든 손 내밀면 원하는 것을 내주는, 필요할 때만 문이 열리고 필요가 사라지면 존재조차 잊히는, 이를테면 흔히 말하는 '편의점' 같은 존재였다는 자각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도현의 손끝을 멈춰 세운 편지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이 년 전 겨울, 서윤이 급하게 보내온 짧은 서신이었다. '도현아, 나 좀 도와줘. 다른 사람한테는 말할 수가 없어서 너한테만 부탁하는 거야.' 그날 도현은 밤새 눈길을 헤치고 서윤의 집으로 달려갔었고, 그녀가 곤란해하던 일을 대신 처리해준 뒤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선명했는데, 그때 서윤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는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다른 사람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음엔 내가 꼭 갚을게…… 라니.' 그 다짐이 실제로 지켜진 적이 있었는지 도현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올릴 수 없었고, 오히려 자신이 무언가를 부탁했을 때 서윤이 곤란한 기색을 내비치며 미루거나 흐지부지 넘겼던 기억들만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한 번은 도현이 무예원 시합을 앞두고 잠시 시간을 내어 자신을 응원해달라는 부탁을 건넸던 적이 있었는데, 서윤은 "그날은 좀 바쁠 것 같은데……"라며 흐리게 말끝을 흐렸고, 결국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을 도현은 이제야 뚜렷하게 곱씹고 있었다. 이런 관계의 구조를 두고 사람들은 흔히 '편의의 관계'라 불렀는데, 한쪽은 필요할 때마다 상대를 소환하고 다른 한쪽은 그 소환에 응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받는 식으로 굴러가는 관계를 뜻했으며, 문제는 그 관계 안에서 소환당하는 쪽이 스스로를 소모품으로 여기게 되면서도 그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었고, 도현이야말로 바로 그 전형적인 예였다. 그는 손끝으로 편지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나는 대체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그렇게 달려갔던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고, 도현은 그 침묵 속에서 자신이 서윤에게 쏟았던 시간과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를 헤아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서재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밝게 쏟아지고 있었으나 도현의 마음속은 오히려 그 반대로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는데, 그는 편지 뭉치를 서랍 안쪽 깊숙이 밀어 넣으며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서랍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탁. 그 짧은 소리가 서재 안의 정적을 깨뜨렸고, 도현은 그 소리와 함께 마치 무언가를 끊어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다시는…… 이런 식으로 살지 않겠어.' 작게 되뇐 그 말이 스스로도 낯설게 느껴질 만큼 단호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도현이 살아온 방식 전체를 뒤엎겠다는 선언이었고, 그 순간만큼은 가슴속 통증조차 오히려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연료가 되어주는 듯했다. 도현은 창가로 걸어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빛에는 이전과는 다른 서늘한 결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하인이 서재 문을 열고는, 삼남 도련님을 뵙고자 하는 손님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도현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이 시간에 찾아왔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딱히 짐작이 가는 사람은 없었기에 도현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 문을 열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뜻밖에도 왕립 무예원에서 함께 수련했던 동기, 준혁이었다. "도현,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 준혁은 특유의 시원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으나, 그 눈빛 어딘가에는 평소와는 다른 묘한 여유가 서려 있어 도현은 그것이 무엇인지 딱히 짚어내지 못한 채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별일 아니야. 그런데 갑자기 여긴 왜." "그냥, 요즘 네가 좀 힘들다는 얘기가 들려서." 준혁의 대답은 가볍게 흘러나왔지만, 도현은 그 말 안쪽에 숨겨진 미묘한 뉘앙스를 감지했고, 무예원에서 검술 수석으로 이름을 날리던 준혁이 자신을 굳이 찾아온 이유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예감에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준혁은 소파에 앉기 전, 응접실을 한번 훑어보며 낮게 웃음을 흘렸는데, 그 웃음이 어딘지 도현의 신경을 긁는 듯했다. "오랜만에 와보니 여전히 좋은 집이네. 넌 참 편하게 사는구나." 그 말이 단순한 인사치레인지 아니면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것인지 도현은 쉽게 가늠할 수 없었으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가 목덜미를 스치듯 서늘하게 느껴졌다. '설마…… 이 녀석도 뭔가 알고 온 건가.' 그 짧은 의심은 아직 확신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나, 준혁이 응접실 소파에 편안히 앉으며 던진 다음 한마디는 그 예감을 한층 짙게 만들었다. "서윤이 요즘 많이 힘들어한다더라. 네가 곁에 없으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도현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다시 욱신거렸으나, 그는 애써 표정을 다스리며 준혁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도현의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미묘하게 떨렸는데, 그 떨림을 준혁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는 생각에 도현은 곧바로 후회했다. 준혁은 그런 도현의 반응을 놓치지 않은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다리를 꼬았다. "별거 아니야. 그냥 걔가 요즘 네 얘기를 자주 하더라고. 도현이가 왜 이렇게 연락이 없냐고." 그 말속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단순한 안부인지 혹은 다른 의도가 숨겨진 화법인지 도현은 좀처럼 판단할 수 없었고, 그런 그의 침묵 속에서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미묘하게 팽팽해지고 있었다. 응접실 안으로 스며든 아침 햇살이 두 사람 사이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고, 도현은 그 그림자가 마치 자신이 벗어나려 했던 관계의 흔적처럼 느껴져 저도 모르게 손끝을 말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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