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남작가 삼남의 환골탈태

4화

준혁이 다녀간 뒤로도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저택 안을 서성이던 도현은, 결국 다시 뒷마당으로 나가 벤치에 걸터앉았는데, 저녁 무렵의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준혁이 남기고 간 말들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아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왕국 제일의 미녀와 결혼할 수 있는 남자가 되라니…… 도대체 왜 그런 조건을 내걸었던 걸까.' 서윤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떠난 그 말은,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그저 헤어짐의 방식이 유난스럽다고만 생각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조롱인지 시험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게 되어 도현의 가슴 한쪽을 계속해서 짓눌러왔다. 바스락. 마른 잎이 밟히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지은이 찻잔 두 개를 든 채 그의 옆으로 다가와 앉으며 아무 말 없이 한쪽 잔을 건넸고, 김이 올라오는 찻잔의 온기가 손끝에 닿는 순간 도현은 그제야 자신의 손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준혁이 왔다 갔다고 들었어." 지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담담했지만, 도현은 그녀가 이미 준혁의 방문 목적을 짐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말투에서 읽어냈고, 그것이 오히려 그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는데, 마치 자신의 속내가 이미 다 들여다보인 듯한 느낌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누나는…… 뭘 알고 있는 거야." 조심스레 묻는 그의 물음에 지은은 잠시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도현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평소보다 한층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는데, 그 얼굴에는 그동안 도현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종류의 무게가 실려 있어 그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도현아, 너 지금까지 살면서 네가 정말로 원하는 걸 스스로 정해본 적이 몇 번이나 있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도현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 채 입술을 다물었고, 머릿속으로 지난 시간들을 하나씩 되짚어보았으나 떠오르는 것은 언제나 남의 기대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던 자신의 모습뿐이었으며, 그 침묵이 곧 답이라는 사실을 지은도 알고 있는 듯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너는 착한 아이야. 그건 나쁜 게 아니지. 그런데 서윤이는…… 그런 너를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지은의 말은 냉정했지만 결코 악의 없는 것이었고, 오히려 그 냉정함 안에 담긴 진심이 도현의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렸는데, 그는 이내 목이 메어오는 것을 느끼며 손에 든 찻잔을 꽉 움켜쥐었고, 손등 위로 힘줄이 옅게 드러날 만큼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이용할 줄 아는 사람……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 문장을 속으로 되풀이하며 도현은 지금껏 자신이 애써 외면해온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고, 서윤이 웃으며 건넸던 수많은 부탁들, 자신이 한 번도 거절하지 못했던 그 순간들이 하나둘 머릿속에서 되살아나 명치 끝을 무겁게 눌렀는데, 그것은 결코 유쾌한 감정이 아니었으나 동시에 오래도록 짊어졌던 무게를 조금씩 내려놓는 듯한 이상한 해방감이기도 했다.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해." 간신히 짜낸 물음에 지은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이미 저물어가는 하늘은 옅은 주황빛과 회색빛이 뒤섞여 있어 마치 지금 도현의 마음속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고, 그녀는 다시 도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서윤이가 그런 말을 했다지, 왕국 제일의 미녀와 결혼할 수 있는 남자가 되라고. 웃기는 조건이야. 하지만 도현아, 그 말에 휘둘려서 그 여자를 찾아 나서는 게 아니라, 네가 정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찾아 나서야 해." 지은의 조언은 부드러운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냉정한 채찍질에 가까웠는데, 그녀는 도현이 지금까지의 안락한 태도, 즉 누군가에게 맞추고 그 반응에 안도하는 방식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 이번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 것이라 경고했고, 그 경고는 도현의 가슴을 서늘하게 파고들었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 "당연히 안 쉽지. 그런데 너, 이제껏 쉬운 쪽으로만 살아왔잖아. 그 결과가 지금 이거야." 지은의 단호한 말에 도현은 순간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반박할 말을 찾으려 할수록 오히려 그녀의 말이 옳다는 사실만 더욱 선명해질 뿐이었고, 결국 그는 이내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조용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누나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 내가 정말 바뀔 수 있을 거라고." 도현이 다시 고개를 들며 묻자, 지은은 잠시 침묵했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확신하는 게 아니야. 믿어보려는 거지. 너는 그동안 남을 위해서만 살아왔으니까, 이제는 너를 위해서도 한 번쯤은 그럴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 대답은 위로도 아니었고 격려도 아니었으나, 오히려 그 무심한 듯한 말투 속에 담긴 진심이 도현의 마음을 더 세게 흔들었고,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손안의 찻잔만 내려다보았다. 달칵. 찻잔을 다시 내려놓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고, 지은은 그런 도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그 손길에는 오래도록 동생을 지켜봐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익숙한 온기가 담겨 있었다. "내가 도와줄게. 하지만 이번엔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라, 네가 스스로 판단해야 해. 그게 조건이야." 그 말에 도현은 고개를 들어 지은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빛 속에는 애정과 동시에 결코 물러서지 않을 단호함이 함께 담겨 있어, 그는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가슴이 저리게 떨려왔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거지…… 지금까지의 나를 완전히 버리는 대가.' 그 생각과 함께 도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고,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것을 느끼면서도 애써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지은의 뒤를 따랐는데, 앞장서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유난히도 단단해 보여 그는 자신도 언젠가 저런 뒷모습을 가질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택의 복도를 걸으며 도현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정원의 나무들을 바라보았고, 서윤과 함께 걸었던 그 길들이 이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는 사실에 낯선 기분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이 이제 정말로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저녁, 저택의 대문 앞에서 마차 바퀴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덜컹, 덜컹. 시종의 다급한 발소리가 복도를 가로질러 도현의 방문 앞에서 멈춰 섰고, 문을 두드리는 손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도현이 문을 열자, 시종의 손에는 금박으로 봉인된 왕궁의 초청장이 들려 있었다. "도련님…… 왕궁에서 도련님을 초청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도현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고, 그는 아직 지은과의 대화가 채 가시지 않은 마음으로 그 초청장을 받아든 채, 도대체 왕궁이 자신을 부를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