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찬 건 너, 차는 건 나

5화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삼십 분이나 일찍 집을 나섰다. 딱히 서두를 이유가 없었는데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는 걸, 버스 정류장에 서서야 깨달았다. 텅 빈 교실 안으로 들어서자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새벽 공기가 서늘하게 감돌았고, 아직 불도 켜지 않은 교실은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책상들이 늘어서 있을 뿐이었는데도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내 자리에 앉아 가방도 풀지 않은 채 어제 저녁 발견한 그 키링을 계속 떠올리고 있었다. 캐릭터의 눈매, 색이 살짝 벗겨진 왼쪽 귀 부분, 그리고 목에 매달린 은색 고리까지... 그 모든 디테일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그게 정말 내가 준 거랑 같은 거였을까...' 하는 의심이 자꾸 맴돌았지만,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설마 그 애 가방을 뒤져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책상 위에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어제 계단 아래에서 엿들었던 그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어.' 그 한 문장이 무슨 뜻인지, 나는 밤새 뒤척이면서도 답을 찾지 못했다. 한서아가 교실로 들어선 건 그로부터 십 분쯤 지난 후였다. 그 애는 가방을 어깨에서 내리며 평소처럼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밝았고, 표정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나는 그 인사에 대답하지 않은 채, 그 애가 가방을 의자 옆 걸이에 걸어두는 모습을 슬쩍 지켜보았다. 가방 지퍼에는 어제 봤던 그 작은 키링이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 캐릭터의 형태, 색깔, 심지어 살짝 벗겨진 도색 부분까지, 나는 그걸 정면으로 확인하고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저건 2년 전 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산 그 키링이 맞았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그때는 그냥 흔한 캐릭터 굿즈라고, 어디서나 살 수 있는 물건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다시 보니 그 위화감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저 벗겨진 자국은, 내가 그때 실수로 떨어뜨렸을 때 생긴 흠집이었다. 세상에 똑같은 흠집을 가진 키링이 또 있을 리 없었다. "...그 키링." 나도 모르게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한서아는 순간 움찔하며 가방을 자기 쪽으로 살짝 당겼고, 그 반응이 오히려 내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어놓았다. "이거? 그냥... 예전부터 갖고 있던 거야." 한서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시선은 나를 피해 창밖으로 향했고, 손끝은 가방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 애가 지금 뭔가를 감추려 애쓰고 있다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애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음 말을 이어야 할지 잠깐 망설였다. 이대로 그때 그 얘기를 꺼내면, 2년간 쌓아온 냉정한 벽이 순식간에 무너질 것 같은 불안감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애써 눌러왔던 감정들이, 이 작은 키링 하나로 전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결국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버리지 않고... 왜 아직도 갖고 있는데." 내 질문에 한서아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그 애는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가, 또다시 벌렸다. 몇 번이나 그렇게 말을 삼키는 걸 지켜보면서, 나는 저 애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숨죽이며 기다렸다. 그런데 그 순간. 탁! 교실 뒷문이 벌컥 열리며 몇몇 아이들이 시끄럽게 들어오는 바람에 대화는 그대로 끊기고 말았다. "어? 뭐야 두 사람, 아침부터 심각한 얘기 중이었어?" 친구 하나가 눈치 없이 끼어들자, 한서아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며 밝게 웃어 보였다. 방금 전까지 흔들리던 눈동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고, 목소리도 다시 발랄하게 튀어 올랐다. "아니야,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어제 숙제 얘기하고 있었어." 그 애는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다른 쪽으로 돌렸지만, 나는 그 웃음 뒤에 숨은 당혹감을 놓치지 않았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뭔가를 필사적으로 감추고 있다는 걸,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날 하루 종일, 나는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선생님이 칠판에 판서하는 내용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옆자리 친구가 몇 번이나 내 어깨를 툭툭 치며 필기를 보여줬을 때도 나는 그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머릿속으로는 계속 그 키링의 존재가 의미하는 것들을 정리하려 애썼지만, 정리가 될수록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2년 전 그렇게 매정하게 나를 거절하고 밀어냈던 애가, 왜 아직까지 그 선물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던 걸까.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었지만, 어제 엿들었던 계단 아래의 대화까지 겹쳐지자, 그 우연이라는 단어는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점심시간에는 일부러 한서아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 애도 나를 피하는 듯했는데, 급식실에서 스치듯 지나칠 때조차 서로 시선을 슬쩍 돌리며 모른 척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저 애가 지금 나만큼이나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방과 후, 나는 궁도부 연습장으로 향하는 길에 준서를 다시 만났다. 준서는 내 표정을 보고는 대번에 뭔가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니 오늘 표정이 또 이상하다. 뭔 일 있었제?"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그날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준서에게 털어놓았다. 키링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 듣고 난 준서는 팔짱을 낀 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진짜 이상하네. 그냥 좋아했다가 마음 변한 거면 그런 거 진작에 버렸을 낀데. 이 년이나 갖고 다닌다는 거는..." "그러니까." "니 생각에는 그 여자애가 니한테 뭔 말 못 할 이유가 있어서 그때 그렇게 매정하게 굴었던 거 같제?" 준서의 질문에,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어제 계단 아래에서 들었던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어'라는 그 말이 다시 머릿속에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준서는 내 대답을 기다리다가, 대답이 없자 그저 어깨를 한 번 툭 치고는 활 케이스를 어깨에 걸쳤다. "뭐, 니가 알아서 하겠지만... 너무 깊이 파고들지는 마라. 사람 마음이라는 게 파낸다고 다 나오는 거 아이거든." 나는 활을 손에 쥔 채 표적지를 노려보았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시위를 당기는 손끝이 평소보다 무거웠고, 화살은 몇 번이나 표적을 빗나갔다. 준서가 옆에서 낮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그마저도 제대로 신경 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우연히 창밖을 보다가 낯익은 뒷모습을 발견했다. 학원 건물 앞 골목에서, 한서아가 누군가와 마주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뚝! 나는 자리에서 몸을 반쯤 일으키며 창에 얼굴을 바짝 붙였다. 상대는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였는데, 그 남자의 표정이 심각해 보였고 한서아 역시 고개를 푹 숙인 채 뭔가를 듣고 있는 듯한 자세였다. 버스가 지나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남자의 손에 들린 서류 봉투와, 한서아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저 남자, 대체 누구지. 아빠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누구... 버스가 골목을 벗어나 멀어지는 동안에도, 나는 자리에서 몸을 반쯤 돌린 채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 남자는 누구고, 저 서류는 무엇이며, 한서아는 왜 그렇게 어깨를 떨고 있었던 걸까. 나는 그 의문들을 도저히 풀지 못한 채, 그저 불안한 예감만이 가슴 한쪽에 무겁게 내려앉는 걸 느껴야 했다. 버스 창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게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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