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일곱 살에 빙의라니

2화

채서연의 눈동자가 검은 기류를 좇았다. 검 끝은 여전히 내 목 앞에 있었으나 그녀의 손목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눈에 보였다. 손등에 돋아난 핏줄이 파르르 떨리고, 검신을 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으려 안달했지만, 정작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갈비뼈 안쪽에서 뭔가가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일곱 살짜리 심장에게 이 정도 긴장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하였다. 씨발, 지금 죽는 건가. 전생에서 서른 해를 살아남으며 별의별 흉악한 상황을 다 겪어봤다고 생각했는데, 그 어떤 순간에도 일곱 살배기 몸으로 검 앞에 서본 적은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릎이 저 혼자 꺾이려는 걸 억지로 붙들어 세웠다. "이런 기운을..." 채서연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내 손끝, 아니 조금 전까지 그곳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던 검은 기류의 잔상을 쫓고 있었다. "본 적이 있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그녀의 눈빛이 살의에서 혼란으로 옮겨가는 걸 지켜보며, 지금이 아니면 말을 걸 기회가 없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런데 입을 여는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정신력을 조금 쓴 것뿐인데 다리가 풀렸고, 시야가 흔들렸으며, 속이 뒤집힐 것 같은 느낌이 밀려왔다. 아, 조졌다. 이 몸뚱이는 정말이지 종잇장 같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데도 무슨 대가를 치르는 기분이었다. 시야 가장자리가 뿌옇게 흐려지고, 방 안의 불빛이 두 개, 세 개로 겹쳐 보였다. 버텨야 한다. 지금 쓰러지면 그대로 검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서연!" 문밖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터졌다. 그 한마디에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갈라지는 게 느껴졌다. 곧이어 문이 다시 열리며 키가 큰 남자가 들어섰다. 짙은 눈썹, 단정하게 정리된 수염, 그리고 아내의 검을 보는 순간 안색이 굳는 얼굴. 이건우였다. 그의 눈이 채서연의 손에서 검을, 그다음 내 목덜미를, 마지막으로 바닥에 무너지듯 앉아있는 설이를 차례로 훑었다. 그 짧은 순간에 그가 상황을 얼마나 정확히 읽어냈는지, 낯빛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는 걸로 짐작할 수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이건우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으나 그 안에 담긴 긴장은 명백했다. 그는 성큼 걸어와 채서연의 검을 든 손을 붙잡았다. 두 사람의 손이 검 위에서 겹쳤다. 남편의 커다란 손이 아내의 손목을 감싸는 그 장면이, 이상하게도 애처로워 보였다. "놔요. 이 아이는..." "안다." 이건우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당신 마음도 안다고. 하지만 지금 이 아이를 베면 정말로 하준이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거야." 채서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검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깨가 들썩이는 게 보였다. 저 여자는 지금 검을 놓는 것과 아들을 놓는 것을 같은 무게로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미 돌아오지 않았어! 저 눈을 봐요! 저건 하준이의 눈이 아니야!" 그녀가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담긴 것은 순수한 분노가 아니라 자식을 잃은 어미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절규였다. 목이 갈라질 듯한 그 외침이 방 안 공기를 찢어놓았다. 나는 그 절규를 들으며,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미안한 감정이 명치 아래를 짓눌렀다. 전생에서 나는 아이를 가져본 적도 없었으나, 자식을 잃은 부모의 감정이 어떤 종류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복수를 하며 살았던 서른 해 동안 내가 짓밟았던 것들 중에도 누군가의 자식이 있었을 테니까. 내가 목을 조르고, 계좌를 털고, 인생을 파탄냈던 그 모든 사람들 뒤에도 저런 눈으로 울어줄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지금 이 여자의 절규는, 어쩌면 내가 만들어놓고 외면했던 수많은 절규들의 축소판이었다. "저는..."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목구멍이 바싹 말라 첫 음절을 뱉는 것조차 힘겨웠다. "저는 하준이가 아니에요. 하지만 이 몸을 함부로 쓰지는 않을게요."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채서연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건우도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흔들렸다. "뭐라고?" "저는... 다른 곳에서 왔어요. 어떻게 왔는지는 저도 모르지만, 눈을 뜨니 여기였어요." 말을 뱉고 나서야 이게 얼마나 미친 소리로 들릴지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거짓말을 지어낼 여유도, 재간도 없었다. 그냥 사실을 던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이건우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경계와 슬픔, 그리고 아주 미세한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자식의 몸에 낯선 존재가 들어앉았다는 말을 듣고 보이는 반응이, 분노도 아니고 광기도 아니라는 게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저 침착함 아래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방금 그 검은 기운은 뭐지." 그가 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으나, 그 질문 하나에 방 안의 모든 시선이 다시 내게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갑자기 나온 거예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몰랐다. 손끝에서 뭔가가 뭉쳐지는 느낌이 들었을 뿐, 그게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 다시 부를 수 있는 건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그 기운이 나오는 순간 채서연의 검이 멈췄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했다. 채서연이 검을 완전히 내리지는 않았으나, 검 끝이 내 목에서 반 걸음 정도 멀어졌다. 그 반 걸음의 거리가 지금 이 순간 내가 얻어낸 유일한 안전지대였다. 반 걸음. 우습게도 그 거리가 나에게는 수백 미터처럼 느껴졌다. "여보, 일단 검을 거둬." 이건우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아내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살짝 풀리는 게 보였다. "저 아이가 위험한 존재인지는 확인해봐야 알아. 지금 죽여버리면 확인할 방법도 사라져." "확인이라니, 확인이라니!" 채서연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저게 죽인 하준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 뻔히 보면서 확인이라는 말이 나와요?" "확인하지 않으면 우린 아무것도 모른 채 남은 평생을 살아야 해." 이건우가 낮게 대꾸했다. "당신이 저 아이를 베고 나면, 그다음엔 뭐가 남는지 알아? 하준이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확신뿐이야. 그거라도 감당할 수 있어?" 채서연은 한참을 노려보다가, 결국 검을 내렸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검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아들을 완전히 놓아버리는 일처럼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검을 쥐었던 손이 허공에서 잠시 갈 곳을 잃은 듯 떨리다가, 이내 옆구리로 툭 떨어졌다. 방 안은 여전히 팽팽했으나, 최소한 목숨이 걸린 위기는 지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듯 무릎을 꿇었다. 다리가 더는 버티지 못했다. 안도감이 몸을 훑고 지나가자마자, 그동안 참아왔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설이가 다급히 다가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도련님, 도련님, 정신 차리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웅웅 울렸다. 시야가 흐릿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지길 반복했다. 채서연과 이건우가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나는 여전히 의심으로 가득 찬 눈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심스러운 경계심을 품은 눈이었다. 둘 다 나를 완전히 믿지 않는다는 것만은 명확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조차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으니까. 방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나는 조금 전 손끝에서 흘러나왔던 그 검은 기류의 감촉을 떠올렸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서늘함과 동시에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린 무언가를 다시 손에 쥔 것 같은, 그런 낯설고도 낯설지 않은 감각이었다. 나는 아직 몰랐다. 방금 내 손끝에서 새어나온 그 검은 기운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앞으로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무기가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 무기가, 언젠가는 이 방 안에 있는 두 사람을 다시 검 앞에 서게 만들 씨앗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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