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일곱 살에 빙의라니

4화

밤이 얼마나 깊었는지, 창밖 달빛의 위치가 처음보다 한참 기울어 있었다. 방 안은 조용했고,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내 손끝만이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한 번. 손끝에 힘을 모았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두 번. 이번엔 아랫배 어딘가에서부터 끌어올리듯 힘을 짜냈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셀 수도 없이 반복했다. 손끝이 저릿해질 때까지, 관자놀이에서 식은땀이 흐를 때까지 계속했지만 검은 기류는 끝내 피어오르지 않았다. 완전히 방전된 배터리처럼, 몸속 어딘가의 회로가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손가락을 쥐었다 펴도, 눈을 질끈 감고 정신을 집중해도, 그저 일곱 살짜리 아이의 몸뚱이가 헐떡이는 숨소리만 방 안에 울릴 뿐이었다. 씨발, 이럴 줄 알았지. 나는 이불을 다시 끌어당기며 속으로 욕을 삼켰다. 전생에서도 그랬다. 반파 소환은 한 번 쓰면 최소 하루는 재충전이 필요했으니까, 지금 이 조그만 몸뚱이가 그걸 버텨낼 리가 없었다. 그때는 성인의 몸이었고, 수십 년간 단련된 마나 회로가 있었다. 지금은 뭐? 우유도 제대로 못 마시는 애송이 몸뚱이에, 회로랍시고 있는 건지도 의심스러운 상태였다. 인과율이 억까를 부린다는 말이 딱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가 싶었다. 결국 잠이 든 건 새벽이 다 되어서였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창호지 너머로 환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도련님, 일어나셨어요?" 문틈으로 설이의 얼굴이 살짝 들어왔다. 눈두덩이가 아직 붉었다. 어제 그렇게 울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눈가에 남은 물기 자국이 아침 햇살에 얼핏 비쳤다. "마님께서... 아침 드시고 오시라고..." 말끝이 흐려지며 목소리가 다시 갈라졌다. 설이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고, 그 모습이 마치 살얼음판 위를 걷는 사람 같았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의 근육이 뻐근했다. 마치 마라톤을 완주한 것 같은 피로감이었는데, 사실 나는 손끝 하나 까딱한 것뿐이었다. 이 몸의 한계가 이 정도였다. 전생의 나였다면 코웃음도 안 쳤을 소모량인데, 지금은 이게 전부였다.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설이는 계속 내 눈치를 살폈다. 대야에 담긴 물이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정신을 조금은 깨워주었다. 거울 대신 놓인 놋대야 표면에 어렴풋이 비친 내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일곱 살짜리 얼굴로 서른 살의 각오를 짊어지고 있으니, 이거 참 우스운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아침상은 조용했다. 이건우는 평소처럼 담담한 얼굴로 밥을 뜨고 있었고, 채서연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젓가락을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그 침묵이 무거워서,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이 집안 공기가 이렇게 팽팽했나. 아니, 원래 그런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만든 거였다. 밥그릇에서 올라오는 김이 방 안의 유일한 움직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드시게." 이건우가 말했다. 낮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젯밤의 탈진 때문인지, 아니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주는 압박감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국그릇에 숟가락이 닿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채서연의 시선이 그 소리에 잠깐 흔들리는 걸 느꼈지만, 이내 다시 젓가락으로 돌아갔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채서연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또 뭘 했지."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이었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도망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다시 시도해봤습니다."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채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두려움인지 경계심인지 알 수 없는 그 흔들림을 나는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녀의 손끝이 젓가락 끝을 꾹 누르고 있는 게 보였다. 나무 젓가락이 살짝 휘어질 정도였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7세 아이의 성대로 30세의 각오를 담아내려니 자꾸만 목이 메었다. "제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요." 이건우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의 시선이 아내에게, 그리고 나에게로 번갈아 움직였다. 방 안의 공기가 한층 더 팽팽해졌다. "들어보자."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가 방 안 공기를 다시 한번 눌러 앉혔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전생의 이야기를, 이 세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어떻게 옮겨야 할지.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문장을 고쳐 써봤지만, 그 어떤 표현도 이 상황에 딱 맞아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나는 가장 단순한 방식을 택했다. "저는 원래 다른 세계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죽었고, 눈을 떠보니 이 몸이었습니다."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지만,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제가 원래 이하준이라는 아이가 아니라는 걸, 두 분도 이미 아셨을 겁니다." 채서연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손끝이 식탁 위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이건우는 미간을 좁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했다. "제가 손끝에서 낸 그 검은 기류는, 제가 원래 세계에서 쓰던 능력의 흔적입니다. 소환술이라 불렀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그 힘으로... 복수를 했습니다." 말을 하다 보니 목이 메어왔다. 전생의 그 밤이, 아내의 시신 앞에서 검은 기류를 뿜어내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날 밤의 냄새까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피비린내와 흙냄새, 그리고 타오르던 살의. 젠장, 여기서 눈물이 날 줄은 몰랐는데. "복수라니." 이건우가 조용히 되물었다. "제 아내를 죽인 자에게요." 나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7세 아이의 얼굴로 짓는 표정이 얼마나 낯설게 보일지 알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 방 안이 다시 침묵에 잠겼다. 채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눈빛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경계 이외의 무언가를 보았다. 혼란이었다. 어쩌면 그 혼란 속 어딘가에, 아주 작은 틈이 생겼는지도 몰랐다. "그 힘을... 다시 쓸 수 있느냐." 채서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여전히 갈라져 있었지만, 조금 전과는 다른 온도였다. "모르겠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어젯밤엔 되지 않았습니다. 회복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건우가 아내를 힐끗 보더니, 다시 나를 향해 물었다. "그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지."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형체를 소환하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할지, 아니면 좀 더 지켜봐야 할지.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했다. 지금 다 말해버리면 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검을 다시 들 수도 있었다. 결국 나는 절반만 말하기로 했다. "완전히 통제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조금씩 익혀나가면, 이 집안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말에 채서연의 표정이 복잡하게 얽혔다. 믿음과 의심이 동시에 뒤섞인 얼굴이었다. 이건우도 뭔가 말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결국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옷자락이 문지방을 넘어가는 소리만이 방 안에 남았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완전한 신뢰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검을 다시 들지는 않았으니까. 이건우도 곧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를 한 번 더 쳐다봤는데, 그 눈빛에는 경계와 함께 아주 작은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그날 낮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히 흘러갔다. 설이가 가져다준 죽을 몇 술 뜨는 동안에도, 방 밖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이 집안 전체가 나를 두고 무언가를 재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곱 살짜리 아이가 갑자기 검은 기류를 뿜어내며 복수를 이야기했으니, 정상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오히려 놀라웠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다시 방에 홀로 앉아 손끝을 바라보았다. 오늘 낮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채서연의 흔들리던 눈동자, 이건우의 무거운 목소리, 그리고 그 짧은 침묵들. 이 정도의 신뢰라면, 오늘 밤엔 조금 더 확실한 증명이 필요했다. 나는 이불을 걷어내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손끝에 다시 힘을 모았다. 어제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뭔가, 아주 작은 실이 손끝에서부터 팔뚝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 심장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창밖의 달은 어젯밤보다 조금 더 기울어 있었다. 나는 알지 못했다. 오늘 밤 내가 시도할 그것이, 이 저택 전체의 운명을 뒤흔들 첫걸음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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