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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 주 금요일, 하늘이 유난히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오후였다. 아침부터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부터는 창밖이 아예 회색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는데, 5교시 수업이 끝나갈 즈음에는 이미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교실 안이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칠판에 뭔가를 적으면서도 힐끗 창밖을 확인하던 게 기억난다. "우산들 챙겨 왔니?" 라고 누군가 물었지만 나는 그 질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하늘이 이 정도로 험악해질 줄은 몰랐으니까. 수업이 끝나고 하교 시간이 되자, 빗소리는 완전히 소나기로 바뀌어 있었다. 창문 너머로 운동장이 물바다가 되어가는 게 보였고,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서서 우산을 펴거나, 우산이 없는 애들은 처마 밑에서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챙기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우산을 챙기지 못한 걸 후회해봐야 이미 늦은 일이었으니까. 교문 앞에 서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 정도 비면 금방 그칠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를 품고 그냥 기다려보기로 했다. 발끝으로 바닥의 물웅덩이를 툭툭 건드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산 없지? 같이 써." 유나였다.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와 우산을 펼쳐 든 채, 아무렇지 않게 내 어깨를 톡 건드리고 있었다. 그녀의 은발 머리카락이 우산 안쪽에서 살짝 흔들리고 있었고, 교복 재킷 위로 빗물이 몇 방울 튀어 있는 게 보였다. 밀어내려 했지만 이미 빗줄기가 거세지고 있었고, 그녀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성큼 곁으로 붙어 서 있었다. 결국 나는 마지못해 우산 아래로 몸을 붙였다. 우산이 하나뿐이니 자연스레 팔과 팔이 스치고, 어깨가 닿고, 그녀의 은발 머리카락이 내 볼 옆으로 흘러내리는 감촉까지 느껴졌다. 좋은 향기가 났다. 샴푸 냄새인지 뭔지 모를 옅은 향이 빗냄새와 섞여서, 나는 그 좁은 거리 안에서 심장이 이상하게 뛰는 걸 애써 못 느낀 척했다. 발걸음을 맞추려는 것도 어색해서, 나는 그냥 앞만 보고 걷는 데에만 신경을 쏟았다. "이렇게 걸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유나가 나지막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 옛날... 이라는 말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지만, 굳이 되묻지 않았다. 빗방울이 우산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것 같았고, 그 소리 사이로 그녀의 숨소리까지 선명하게 느껴져서 나는 몇 번이고 걸음을 서두르려 했지만, 좁은 우산 아래에서는 그럴 수도 없었다. 옆으로 지나가는 차들이 물을 튀기며 지나갈 때마다 유나가 살짝 몸을 움츠리며 내 쪽으로 더 붙어오는 것도, 나는 못 느낀 척했다. 골목을 따라 걷는 동안 우리는 별다른 말없이 걸었다. 나는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그녀와 헤어지는 골목이 어서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 유나가 문득 가벼운 말투로 이렇게 덧붙였다. "참, 나 전학 오기 전에 예전 학교 애들한테 너 소식 좀 물어봤거든. 근데 다들 중학교 얘기만 나오면 갑자기 말을 흐리더라? 뭐 일 있었어?" 탁! 그 순간, 걸음이 멈췄다. 완전히, 우뚝. 빗소리가 갑자기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 같았고, 손끝에서부터 온몸으로 서늘한 기운이 번져 나갔다. 우산을 쥔 유나의 손이 살짝 흔들리는 것도 느껴졌지만, 그런 건 이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왜... 하필 지금...' 나는 애써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려 했지만, 표정이 굳어가는 걸 스스로도 막을 수 없었다. 입술이 살짝 떨렸고,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머릿속에서는 순식간에 여러 얼굴들이, 여러 목소리들이 뒤섞여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그걸 애써 밀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아니야. 별일 없었어." 목소리가 낮게, 그리고 조금은 딱딱하게 흘러나왔다. 스스로 듣기에도 어색할 정도로 부자연스러운 대답이었다. 유나는 그 반응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게 보였다. "도윤아?" 그녀가 조심스레 부르는 목소리에도,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오래도록 눌러놨던 기억의 파편들이 순식간에 밀려 올라오려 했고, 나는 그걸 억지로 짓누르며 우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빗물이 그대로 어깨를 적셨지만 그런 건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차가운 빗방울이 목덜미로 흘러내리는 감각조차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머릿속은 온통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중학교... 얘기만 나오면...' "미안, 나 먼저 갈게." 뒤에서 유나가 뭐라고 소리쳐 부르는 것 같았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빗속을 그대로 뛰어나갔다. 다다다다다. 발소리와 빗소리가 뒤섞이는 와중에도, 귓가에는 그녀의 마지막 물음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중학교 얘기만 나오면 다들 말을 흐리더라...'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유나는 아직 전혀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저 순수한 궁금증만 담겨 있었을 뿐, 그 안에 어떤 함정이나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무서웠다. 아무것도 모른 채 무심코 던진 질문이,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숨기고 감춰왔던 것들의 표면을 슬쩍 건드리고 지나갔다는 사실이.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고, 신발 안으로 물이 스며드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골목을 몇 개나 지나쳤는지도 모른 채 그저 앞으로, 앞으로만 달렸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로 흐릿하게 번져 있었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나는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뛰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그걸 알게 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젖은 골목길을 홀로 달려가고 있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온몸이 젖어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싶었지만,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계속 유나의 질문이 맴돌았다. 다들 말을 흐리더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느꼈던 그 서늘함이, 뜨거운 물줄기 아래에서도 가시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불을 뒤척이며 몇 번이나 눈을 떴는지 모른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빗소리가 이어지고 있었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애써 잠을 청하려 했지만, 머릿속은 도무지 조용해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교실에 들어서자 서준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창가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고 있거나, 늦잠을 자서 부스스한 머리로 헐레벌떡 들어올 시간인데, 오늘은 이미 자리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문 쪽을 노려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나는 어제 저녁 내내 억눌러왔던 불안감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느꼈다. "야, 강도윤. 잠깐 얘기 좀 해." 평소와는 다른 그 낮은 목소리에, 나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서준의 눈빛이 여느 때와 달리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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