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모브 소년의 히로인 구제

4화

"어떻게 알았냐고요?" 나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실패했을 확률이 90퍼센트쯤 됐다. 거울이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지금 내 얼굴은 아마 편의점 알바가 CCTV 앞에서 몰래 삼각김밥 유통기한 조작하다 사장한테 걸린 표정이랑 비슷할 거다. "그냥... 감이었어요." "감으로 사람 동선을 그렇게 정확하게 계산해요?" 서은채의 목소리엔 의심이 절반, 호기심이 절반쯤 섞여 있었다. 아니, 비율을 다시 계산해보니 의심이 칠 할이었다. "운이 좋았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었다. 최악의 답변이기도 했다. 서은채는 묵연히 나를 바라보다가 결국 더 파고들지 않고 돌아섰다. 다행이었다. 이 이상 캐물었으면 나는 정말로 대답할 말이 없었다. "사실 제가 3주 전에 이 세계에 회귀... 아니 전생... 아니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원작 소설을 읽어서 압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건 정신병원 직행 티켓이었다. 편도. [마태복음 6:3,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좀 다르게 응용하자면, 내가 뭘 아는지 남이 모르게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이 세계에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거였다. 전부 다 학원물 주역급 스펙을 하나씩 깔고 앉아 있는 놈들이었다. 평범한 배경 캐릭터인 나만 스펙이 없었다. 교무실로 걸어가는 내내 나는 속으로 오늘 있었던 일을 되짚었다. 박성민이라는 놈, 원작에서는 3화쯤 스토킹 신고로 잠깐 언급되고 끝나는 조연이었다. 그런데 그 골목, 그 시간, 그 타이밍까지 내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읽을 때는 그냥 "긴박한 전개구나" 하고 넘겼던 문장들이, 실제로 재현되니까 이렇게 무섭구나. 넷플릭스로 볼 때는 스릴러가 재밌지,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그냥 생존 다큐다. 교무실 앞, 낯선 목소리가 나를 불러세웠다. "이도현 학생." 돌아보니 완벽한 자세로 서 있는 한서아가 있었다. 등이 곧고, 걸음걸이에 흐트러짐이 없고, 심지어 교복 재킷의 주름 하나까지 딱 각이 잡혀 있었다. 저건 사람이 아니라 무슨 의전용 마네킹인가 싶을 정도였다. 입학식 날 신입생 대표로 단상에 올랐던 그 얼굴. 학생회장 예정자. 원작에서 정략결혼 위기로 심리적 붕괴를 겪는 캐릭터인데, 지금은 그런 그림자가 조금도 안 보이는 완벽 그 자체였다. 그림자가 없다는 게 오히려 더 무서운 법이었다. 그림자 없는 캐릭터는 대부분 나중에 한꺼번에 터진다. 원작 지식이 알려주는 불길한 직감이었다. "학생회장 후보로서, 어제 사건 경위를 확인하러 왔어요." "아, 네."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목이 마른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침이 안 넘어가지. "경비실 CCTV 영상을 확인했는데." 한서아의 눈빛이 미묘하게 날카로워졌다. "골목 세 개를 정확히 예측한 것처럼 움직였더라고요. 마치 사전에 동선을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세 번째였다. 아니 잠깐, 오늘 서늘했던 걸 다 세면 이게 세 번째가 맞나? 아무튼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이 상황이었다. "그, 그건..." 말을 더듬는 순간 내가 이미 반쯤 자백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걸 깨달았다. 말 더듬는 놈은 뭔가 숨기고 있는 놈이다. 형사 드라마에서 백 번은 봤던 클리셰인데 그걸 내가 실시간으로 재현하고 있었다. "게다가 박성민이라는 학생, 서은채 학생을 스토킹한 지 얼마나 됐는지 학교에서 아무도 몰랐어요. 담임도, 학생회도, 심지어 상담선생님조차." 한서아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 한 걸음이 마치 취조실에서 형사가 책상을 내리치기 직전의 그 한 걸음 같았다. "그런데 이도현 학생은 그 사람 이름도, 얼굴도, 심지어 성향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 할 말이 없었다. 완전히 없었다. 머릿속에서 온갖 변명 시나리오가 빠르게 스쳤다. "사실 제가 예지몽을 꿉니다" — 아니, 그건 더 이상하다. "우연히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봤습니다" — 이 세계에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없다. "타로카드로 봤습니다" — 이건 그냥 자폭이다. [전도서 1:9, 이미 있던 일은 후에 다시 있겠고] 다시 있을 게 아니라 지금 이미 걸린 상황이었다. 성경 구절이 이럴 때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위로도 안 되고, 변명도 안 되고, 그냥 상황 요약만 정확하게 해준다. 그때, 복도 끝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서아야, 뭐 해." 윤소하였다. 내 옆자리, 어린 시절 친구라는 설정이 있는 그 아이. 한서아와도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걸음걸이가 편안했다. 한서아처럼 각 잡힌 걸음이 아니라, 뭐랄까, 동네 편의점 가는 사람 같은 걸음. 저 여유로운 걸음걸이가 나한테 구원의 손길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심문관의 등장이 될지, 이 순간의 나는 알 수 없었다. "소하야, 마침 잘 왔어. 이 학생, 좀 이상하지 않니?" 윤소하가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유난히 오래 머물렀다. 2초, 3초... 이렇게 세다 보니 이게 무슨 눈싸움도 아니고 뭐 하는 건가 싶었지만 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 피하면 더 수상해 보일 것 같았으니까. ──윤소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도현이라는 아이는 입학 첫날부터 이상했다. 정확히는 뭐가 이상한지 짚어낼 수 없어서 더 이상했다. 명단에서 이름을 확인할 때 눈빛이 흔들렸고, 자리에 앉을 때마다 창밖을 보며 뭔가를 계산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지금, 사건의 전말을 들으니 더욱 확신이 섰다.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의 행동 같았다. 처음엔 그냥 특이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넘겼지만, 오늘 이렇게 세 사람이 얽힌 사건 앞에서 그의 태도를 보니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아이는 뭔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게 뭔지, 왜인지는 몰라도, 알아내고 싶다는 충동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조금." 윤소하가 짧게 답했다. 나는 그 짧은 대답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조금'이라는 두 글자가 이렇게 무거울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무슨 국어사전에 예문으로 실어야 할 정도였다. "조금: 부사. 화자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정도의 확신." "거봐.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어." 한서아가 팔짱을 꼈다. 그 자세마저 완벽했다. 팔짱 낀 자세도 저렇게 각이 나오나. 아마 학생회장 임명될 때 자세 교육도 따로 받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도현 학생, 정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예측했어요?" [욥기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낚을 수 있겠느냐] 못 낚는다. 지금 낚인 건 나였다. 그것도 아주 크고 튼튼한 낚싯대에, 미늘까지 제대로 박힌 채로. 나는 머리를 굴렸다. 최선의 변명, 최선의 회피 루트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이 게임의 학생회장은 원작에서도 IQ 최상위 캐릭터였다. 대충 둘러댄 변명은 즉시 논파당할 거였다. 차라리 그냥 무릎을 꿇고 "제가 이 세계선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도망쳐서 다른 학교로 전학 가는 게 나을까. 현실적으로 후자는 불가능했다. 이 세계에 전학 가능한 다른 학교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저기, 사실은..." 망설이는 사이, 한서아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그 눈빛만으로도 이미 절반쯤 자백을 받아낸 기분이 들었을 거다. 나 같으면 그랬을 거다. "제가 어릴 때부터 사람 행동 패턴 읽는 걸 좀 좋아해서요. 프로파일링 같은 거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스스로 말하면서도 이건 너무 급조했다는 걸 느꼈다. 마치 시험 답안지에 "잘 모르겠지만 아마 3번인 것 같습니다"라고 적는 수준의 자신감이었다. "프로파일링으로 CCTV도 안 본 골목 동선을 맞췄다고요?" "...우연이 겹친 거죠." 한서아는 잠시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언가를 재는 눈빛이었다. 학생회장 후보라기보다는 검사나 형사의 눈빛에 더 가까웠다. 혹시 이 여자, 나중에 검사장이라도 되는 서브 히로인은 아니었을까. 원작 프로필에는 그런 설정이 없었던 것 같은데, 지금 눈빛만 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어 보였다. "좋아요. 오늘은 넘어가줄게요." "...감사합니다."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했다.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표정까지 안도해버리면 그거야말로 완전한 자백이었다. "하지만." 한서아가 몸을 돌리며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저는 우연을 잘 안 믿는 성격이라서. 계속 지켜볼 거예요, 이도현 학생."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복도를 걸어갔다. 걸음걸이마저 처음 등장했을 때와 똑같이 각이 잡혀 있었다. 저 사람은 화가 나도, 의심을 해도, 걸음걸이만큼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 타입인 것 같았다. 윤소하도 뒤따라가며 다시 한번 나를 돌아봤다. 그 시선에는 경계심 대신, 뭔가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호기심, 아니면 그보다 더 위태로운 무언가. 나는 그 시선의 의미를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저건 방금 전 한서아의 시선과는 결이 완전히 달랐다는 것뿐이었다. 한서아의 눈빛은 "너 뭔가 숨기고 있지"였고, 윤소하의 눈빛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너를 더 알고 싶다"에 가까운 느낌이었달까. 아니, 이건 내가 너무 멀리 나간 해석일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종일 시달려서 뇌가 오작동하는 걸지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오늘 벌써 네 번째였다. 이 정도면 등에 상시 서늘함이 거주하는 수준이었다. 아예 등짝에 에어컨을 하나 매달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복도에 혼자 남은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지나간 폭풍 같았던 5분이 마치 5년처럼 느껴졌다. 서은채, 한서아, 윤소하. 벌써 세 명의 주역급 캐릭터가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이 속도로 나가면 다음 화쯤엔 남주인공까지 나서서 "너 대체 누구냐"고 물어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슬프게도, 늘 맞아떨어지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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