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심야방송, 정체 들켰다

5화

방송을 켜기 직전, 나는 오늘따라 유독 오래 마이크를 만지며 시간을 끌었다. 손끝으로 마이크 헤드를 몇 번이나 매만지며 각도를 조절하는 척했지만, 실은 방송을 시작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접속자 수가 하나둘 올라가는 걸 화면 구석으로 흘겨보면서도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는데, 그건 순전히 낮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오하늘의 눈빛. 강의실 안의 그 짧은 침묵. 그리고 서은채의 알 것 다 안다는 듯한 시선. 그 세 가지가 머릿속에서 뒤엉켜 목 안쪽을 조여왔고, 나는 몇 번이나 물을 마셔도 그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걸 느끼며 애꿏은 물병만 만지작거렸다. 오하늘은 복도에서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별다른 말도 없이 그냥 나를 오래 쳐다봤을 뿐이었는데, 그 시선이 왜 이렇게까지 신경 쓰이는 건지 나로서도 설명할 수 없었다. 확신에 가까운 무언가를 담고 있던 그 눈빛이. 결국 방송을 시작했지만 평소보다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오늘은… 그냥 국물 요리 하나 할게요." 말하면서도 스스로 목소리가 어색하게 들려서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채팅창에 반응이 올라왔지만 나는 평소처럼 그 문장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좇을 여유가 없었다. 냄비에 물을 받고 육수 재료를 넣는 손짓도 오늘은 유난히 느렸는데, 도마 위에서 파를 써는 칼질 소리마저 평소보다 크게 울리는 것 같아서 나는 몇 번이나 어깨를 움츠렸다. 손이 재료를 써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계속 낮의 장면으로 돌아갔다. 몇 년 전, 그날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고등학교 축제 준비 기간이었고, 반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이미 그때부터 배경 취급을 받고 있었다. 무대 뒤에서 소품을 나르고 현수막을 붙이는 일은 언제나 내 몫이었고, 누구도 내게 무대에 서달라거나 사진을 같이 찍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너는 그냥 뒤에서 자재나 나르면 돼.' 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들은 순간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지금은 흐릿한데, 다만 그때 내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것만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때부터였을까, 존재감을 지우는 게 상처받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게 된 게. 목소리를 낮추고, 시선을 피하고, 누구의 기억에도 오래 남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그 기억이 스치는 사이, 채팅창에 익숙한 닉네임 하나가 떠올랐다. 은채였다. 나는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끼며, 애써 담담한 척 요리를 이어갔다. 냄비 안에서 국물이 끓어오르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고, 나는 그 소리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시선은 자꾸만 채팅창 쪽으로 흘렀다. 『오늘 표정이 안 좋아 보여요.』 목소리만 나오는 방송인데 표정이 보일 리 없었다. 카메라도 켜지 않았고, 화면에는 오직 도마와 냄비, 그리고 내 손만 비칠 뿐이었다. 그런데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그녀가 정말로 내 상태를 꿰뚫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나는 잠시 손을 멈췄다. 국자를 든 채로, 국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우는 사이 나는 몇 번이나 그 문장을 눈으로 되짚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화면 너머로도 이렇게 전해지는 걸까, 아니면 그저 오늘 강의실에서의 내 얼굴이 아직 그녀의 눈에 남아 있는 걸까. 나는 애써 웃음소리를 섞어 "그냥 좀 피곤해서요"라고 얼버무렸지만, 그 말이 얼마나 힘없이 들렸을지 스스로도 짐작이 갔다. 방송은 예정보다 조금 일찍 끝냈다. 평소라면 시청자들과 몇 마디라도 더 주고받았을 텐데, 오늘은 국물이 끓기 시작하자마자 서둘러 마무리 인사를 하고 화면을 닫아버렸다. 화면을 끄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문자가 먼저 도착했다. 『저 은채예요. 번호는… 학과 비상연락망에서 봤어요. 미안해요, 이런 식으로 연락해서.』 나는 그 문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었는데, 그게 불안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스스로도 구분이 안 됐다. 휴대폰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화면의 불빛이 손끝에 반사되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답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커서만 몇 번이나 지웠다 썼다 반복했다. 잠시 후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오늘 학과실에서 그런 얘기 나온 거, 저 때문인 것 같아서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하늘이가 눈치가 빠른가 봐요.』 그 문장을 읽으며 나는 묘하게 안심이 되는 동시에 더 큰 불안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서은채는 비밀을 지켜주겠다는 사람이었지만, 오하늘은 아니었다. 그리고 오하늘의 눈빛은, 오늘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이미 확신에 가까운 무언가로 바뀌어 있었다. 그 눈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그냥 짐작일 뿐일 수도 있잖아, 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봤지만 그 말은 조금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괜찮아요. 그건 신경 안 써도 돼요.』 나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문장을 보내고 나서야 나는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다는 걸 알아챘고, 휴대폰 화면을 옷자락에 슬쩍 닦으며 다음 문자를 기다렸다. 답장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자가 왔다. 이번엔 조금 다른 내용이었다. 『있잖아요, 저 사실… 예전에도 도현 씨 본 적 있어요. 방송 시작하기 전에요.』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나는 숨이 멈추는 걸 느꼈다. 예전에도,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되묻고 싶었지만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굳어버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심장이 아까와는 다른 방식으로, 훨씬 무겁고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라니. 방송을 시작하기 전이라면 대체 언제를 말하는 걸까. 처음 이 방송을 켰던 그날인지, 아니면 그보다 훨씬 이전, 내가 이름도 목소리도 감추기 전의 어느 순간을 말하는 건지. 도대체 언제, 어디서, 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사이, 창밖에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오래전 잊고 지냈던 어떤 얼굴 하나를 어렴풋이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 얼굴이 누구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다만 어딘가 낯익은 온기와, 나를 향해 웃던 표정 하나가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쥔 채로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고, 다음 문자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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