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메시지를 몇 번 주고받다가, 나는 별생각 없이 오늘 있었던 일을 짧게 언급했다. 자료를 챙겨 가겠다는 말 끝에, 집에 문제가 생겨서 오늘 밤은 어디서 지낼지 모르겠다는 말이 툭 튀어나왔던 것도 같다. 별 의도는 없었다. 그저 지쳐서 아무 말이나 흘려버린 것뿐이었다. 배관이 터졌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이미 머릿속은 엉망이었고, 손끝은 화면 위에서 습관처럼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답장은 예상보다 빨리 왔다.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서 지내셔도 돼요." 나는 그 문장을 두 번, 세 번 읽었다.
무슨 소리지?
화면 속 글자는 분명 한국어였는데도, 그 의미가 머릿속에서 제대로 조립되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로 젖은 방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발밑에서 스며 나온 물이 양말 끝을 서서히 적셔가는 게 느껴졌다.
"…네?" 답장을 보내며 나는 손끝이 살짝 떨리는 걸 느꼈다. "저 지금 집에 혼자 있어요. 부모님이 해외 파견 중이셔서 방도 남아요. 급한 상황이신 것 같아서요." "그래도 그건 좀…" "불편하시면 강요는 안 해요. 다만 며칠이라면, 저는 상관없어요."
타협점?
나는 그 짧은 문장들을 다시 읽으며 이걸 어떻게 받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의 집에서 지낸다는 건, 예전 학교에서 겪은 일들을 떠올리면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 선택이었다. 그때도 처음엔 다들 다정했다. 웃으며 다가왔고, 밥을 나눠 먹자고 했고, 집에 초대까지 했었다. 그 끝이 어땠는지는 이제 굳이 되짚지 않아도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은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걸, 나는 이미 몸으로 배운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발이 시린 채로 물에 잠긴 방문 앞에 서 있는 지금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가 딱히 없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관리 아저씨는 내일 아침에나 올 수 있다고 했고, 근처 찜질방이나 편의점 야간 좌석을 떠올려봤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 한계였다.
결국 나는 최소한의 짐만 챙겨 은재의 집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내내 이건 임시일 뿐이라고, 배관이 고쳐지면 바로 원래 방으로 돌아갈 거라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되새겼다.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이어지는 골목을 지나면서, 나는 가방끈을 꽉 움켜쥐었다. 이건 신세를 지는 게 아니라, 그냥 며칠 어쩔 수 없이 얹혀가는 것뿐이라고. 그 말을 몇 번이나 곱씹어도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불편했다.
은재의 집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조용한 주택가 안쪽에 자리한 이층집이었고, 대문을 지나 마당을 가로지르는 동안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 집에 살면서 왜 굳이 나 같은 사람을 들이는 걸까, 하는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낯선 공간의 서늘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나무 바닥에서 나는 마른 냄새와, 어딘가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방향제 향이 뒤섞여 있었다.
"이쪽이 손님방이에요. 원래 부모님 서재로 쓰던 곳인데, 지금은 비어 있어요." 은재가 방문을 열며 말했고, 나는 안을 들여다보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에는 책장 몇 개와 정돈된 침대가 놓여 있었고, 창문 너머로 마당의 나무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진 없어요. 저도 혼자 있는 거 사실 좀 무서웠거든요." 그 말에 나는 순간 그 애를 쳐다봤다. 무서웠다는 말과 저 담담한 표정이 어울리지 않아서였다. 긴 머리를 대충 하나로 묶은 은재는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은 채로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은재는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살짝 웃으며 덧붙였다. "큰 집에 혼자 있으면 밤에 소리가 다 크게 들려요. 그래서 오히려 좋아요, 사람 있는 게."
"그럼 저는… 방음벽 대신인가요."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고, 은재는 그 말에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말하면 좀 슬프잖아요." 그 웃음소리가 낯선 집 안에서 이상하게 크게 울렸다.
그날 밤, 낯선 방의 침대에 누워서도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벽 너머로 은재가 움직이는 작은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소리가 신경 쓰여서 오히려 눈이 더 말똥해졌다. 물 흐르는 소리, 문이 살짝 닫히는 소리, 발걸음이 계단을 오르는 소리. 그 하나하나가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게 귀에 박혔다.
걔? 망설임이 없어?
처음 보는 사람을, 그것도 나 같은 인상을 가진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자기 집에 들이는 그 태연함이 나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상에는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걸, 나는 이미 여러 번 겪어서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은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유 없는 호의는 언젠가 대가를 요구한다는 걸, 나는 몸으로 배운 사람이었으니까.
천장을 바라보며 나는 몇 번이나 같은 생각을 되풀이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벽 너머의 소리가 잦아들었고, 그제야 나도 조금씩 눈이 감겼다.
다음 날 아침, 부엌에서 국그릇 부딪히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조심스레 나가 보니 은재가 이미 식탁에 밥과 국을 차려두고 있었다. 뽀얀 국물에서 올라오는 김이 부엌 안을 데우고 있었고, 그 냄새에 나는 순간 허기를 느꼈다.
"일어나셨어요? 아침 드세요." "…제 것도 있어요?" "당연하죠. 손님인데." 나는 그 말에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냥 자리에 앉았다. 예전 생활이었다면 웃어넘겼을 일인데, 지금은 왜 이렇게 작은 것 하나하나가 낯설고 무겁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숟가락을 들었다가 나는 잠깐 멈췄다. "이거, 저 때문에 일찍 일어나신 거예요?" "원래 이 시간에 일어나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 대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더 이상 묻지 못하고 그냥 국을 떠먹었다. 따뜻한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이상하게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그게 국이 뜨거워서인지, 다른 이유인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등교하는 길, 준호와 태윤이 나를 보더니 대번에 눈치를 챘다. "너 오늘 표정이 왜 그렇게 부드러워?" 준호가 물었고, 나는 급하게 표정을 다잡았다. "…아무 일도 없었어." "수상한데." 태윤이 옆에서 웃음을 참는 얼굴로 덧붙였다. "혹시 좋은 일 있었어? 로또 됐어?" "그럴 리가." 나는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뒤에서 준호가 태윤에게 뭐라고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교실에 들어서자 담임이 칠판에 큼지막한 글씨로 뭔가를 적고 있었다. '중간 실력고사 결과 발표 - 금주 목요일.' 그 글씨를 보는 순간, 반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특진반 쪽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번에 특진반 윤성민이 또 전체 수석이래." 누군가 그렇게 말하는 걸 나는 자리에 앉아서 들었다. 윤성민이라는 이름은 이미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입학식 신입생 대표로 단상에 섰던, 특진반 소속의 그 애였다. 옆자리 아이가 덧붙였다. "당연하지. 걔는 초등학교 때부터 전국구였잖아."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번엔 2등이랑 점수 차가 엄청 크대. 담임들 사이에서도 화제였다던데."
실력고사라니. 나는 별로 관심 없었다. 성적으로 누군가와 비교당하는 건 이제 익숙한 일이었고, 애초에 눈에 띄고 싶지 않았으니까. 조용히 다니다가 졸업만 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남들 눈에 걸리지 않는 것, 그게 이번 생에서 내가 정한 유일한 목표였다.
그런데 며칠 뒤 발표된 결과지가, 그 조용한 계획을 완전히 뒤흔들어놓을 거라는 사실을, 나는 그때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