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몰락 귀족의 마법서

2화

손석준 선생님은 교무실 문을 걸어 잠그신 뒤, 창밖으로 지나가는 학생이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하시고서야 자리에 앉으셨다. 그 신중함이 오히려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는데, 평소 같으면 그냥 "태준이 왔냐" 하고 심드렁하게 말씀하실 분이 이렇게까지 조심스러운 걸 보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확신이 들었다. 선생님은 한참을 말없이 나를 바라보시다가, 결국 무거운 한숨과 함께 입을 여셨다. "태준아, 지금 네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는 나도 모른다" 라는 말이었는데, 그 말투에서 이미 뭔가 짐작하는 게 있으면서도 확신할 수 없어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선생님은 손끝으로 책상 위에 놓인 감별 수정구를 톡톡 두드리시며 말을 이으셨는데, 그 수정구는 여전히 은은한 푸른빛을 내며 진동하고 있었다. 학생들 감별할 때는 그냥 색만 살짝 바뀌고 마는 게 보통인데, 저건 아예 표면이 미세하게 떨리기까지 하고 있었으니, 확실히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다만 확실한 건, 그 감별 수정구가 저렇게 반응한 사례를 내 평생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하고 선생님이 덧붙이셨는데, 그 한 번이 바로 젊은 시절의 백강호 장군이었다는 대목에서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요컨대 내 몸속에 있다는 이 폭식하는 그릇이라는 것이, 제국 최강자의 것과 같은 종류라는 뜻이었으니까.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가, 다시 냉정하게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백강호 장군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불의 거룡을 맨몸으로 격퇴했다는 전설, 제국군 최전선에서 홀로 성벽 하나를 지켜냈다는 전설, 그런 이야기들이 교과서에도 실려 있을 정도의 인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과 내가 같은 종류의 그릇을 가지고 있다니, 이건 축복인지 재앙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위험한 거예요" 하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씁쓸하게 웃으시며 대답하셨다. "그릇이 크다는 것과 그것을 담을 몸이 튼튼하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니까 그렇다"고. 백강호 장군은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신체 자체가 특별했기에 그 거대한 그릇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는 게 요지였다. 선생님은 거기서 한참을 뜸을 들이시더니, "네 몸은 평범한 사람의 몸이다. 그릇만 비정상적으로 크다는 소리야. 컵은 종이컵인데 그 안에 담을 물의 양은 대형 물탱크만 하다는 뜻이지" 하고 비유를 덧붙이셨는데, 그 설명을 듣고 나니 오히려 상황이 더 선명하게 이해가 됐다. 그릇을 함부로 열었다가는 내가 먼저 터져버릴 수도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계속 그 말을 곱씹었다. 골목길 가로등 불빛이 깜빡거릴 때마다 내 그림자가 늘어졌다가 줄어들었다가 하는 걸 보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그 수정구의 진동과 선생님의 씁쓸한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불 속에 누운 채, 나는 다시 시야 한켠에 떠 있는 문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는 걸 보니 이건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뭔가 다른 감각으로 인식하는 모양이었는데, 그것을 인지하자마자 새로운 문구 하나가 떠올랐다. [안내: 사용자 전용 감각창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상태, 스킬, 특성 확인이 가능합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상태'라는 항목을 떠올려보았고, 그러자 마치 종이를 펼치듯 눈앞에 정보가 나열되었다. [이름: 강태준 / 나이: 18 / 신체 내구도: 97%] [마력 그릇: 폭식하는 그릇 (등급 미측정, 개방 시 급속 성장)] [특성: 없음 / 스킬: 없음] 텅 빈 항목들이 오히려 나를 웃게 했다. 이게 무슨 최강자의 시작치고는 지나치게 초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특성도 없고 스킬도 없다니, 이건 뭐 그냥 몸뚱이만 있는 백지 상태 아닌가. 남들은 감별받을 때 벌써 화염 저항이니 신체 강화니 하는 특성 한둘씩은 붙어서 나온다던데, 나는 그런 것 하나 없이 그저 '그릇'만 컸다. ...더럽게 불공평하네,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곧 다른 생각이 그 자리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아주 단순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 그릇을 조금씩, 아주 신중하게 개방해나가면 내구도가 줄어드는 속도를 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이었다. 어차피 특성도 스킬도 없는 마당에, 남들보다 늦게 시작하는 셈이니 조급해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부터 시험을 시작했다. 밤에 물류창고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인적이 드문 뒷골목에서 아주 작게, 손끝에 미약한 열기를 담아보는 정도로만 그릇을 살짝 열어보았는데, 그러자마자 시야에 문구가 떴다. [내구도 -0.1% / 잔여 마력 소량 방출 성공] ...이게, 되네? 나는 손끝에서 피어난 작은 불씨를 보며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마법 이론서에서만 배웠던 원소 조작이, 아무런 마법 훈련도 없이 그냥 되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그 불씨는 손톱만큼 작았고 금세 꺼졌지만, 이게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사이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이었다. 나는 그 조그만 불씨를 두 번, 세 번 다시 만들어보면서, 매번 발생하는 미세한 열감과 손끝이 저릿해지는 감각을 몸에 새기듯 기억해두려 애썼다. 이게 익숙해지면 다음엔 조금 더 큰 걸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나는 매일 밤 조금씩 그릇을 열어 마력을 흘려보내는 연습을 했는데, 흥미로운 건 사용할수록 내구도가 깎이는 만큼 그릇의 개방 범위가 조금씩 늘어난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엔 손끝의 불씨 하나 만드는 데도 진땀을 뺐지만, 나흘째 되던 날에는 손바닥 전체를 감쌀 정도의 열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그때마다 내구도는 0.1퍼센트, 0.2퍼센트씩 조금씩 깎여나갔다. 요컨대 이건 위험한 도박이자 동시에 유일한 성장 수단이었으니, 목숨을 걸고 강해지는 것과 안전하게 약한 채로 남는 것 중에서 나는 이미 답을 정해둔 상태였다. 남들은 특성이니 스킬이니 하는 재능으로 시작선을 앞당기는데, 나는 이렇게 매일 밤 몸을 갉아먹으면서 겨우 몇 걸음씩 나아가는 셈이었으니, 솔직히 억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백강호 장군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뭘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불의 거룡을 맨몸으로 격퇴했다는 전설의 장군이, 처음부터 그렇게 강했을 리는 없었을 테니까. 어딘가에서 이런 식으로 조금씩, 목숨을 저울에 올려놓고 성장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어쩌면 그 사람도 처음엔 나처럼 뒷골목에서 손끝에 불씨나 만들어보는 초라한 시작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조금은 유치한 위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물류창고에서 짐을 옮기고 있는데 갑자기 뒷골목에서 소란이 일었다. 야간 순찰조가 잡지 못한 들개 무리 하나가 골목으로 뛰어들었는데, 그 이빨이 유난히 크고 눈이 붉게 빛나는 게 심상치 않았다. 크기도 보통 들개보다 한 몸집은 더 컸고, 털이 듬성듬성 빠진 자리로 검붉은 반점 같은 게 비쳐 보였는데, 요즘 도시 외곽에서 마력에 오염된 짐승이 자주 출몰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런 놈들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크르르르... 낮은 울음소리가 골목을 채우자, 나와 함께 짐을 나르던 동료 하나가 겁에 질려 뒤로 넘어졌고, 짐 상자가 바닥에 쏟아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 앞을 막아섰는데, 몸이 먼저 움직인 건 순전히 반사였지 계산은 아니었다. 등 뒤에서 동료가 "태, 태준아..."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게 들렸지만, 그 목소리에 대답할 여유도 없었다. [경고: 위협 감지. 그릇 개방을 권장합니다.] 감각창이 알아서 경고를 띄우는 걸 보며,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시스템 메시지가 뜨는구나 하는 실없는 감상을 잠깐 했다가, 곧바로 그릇을 열었다. 손끝에 열기가 몰리는 게 느껴졌고, 평소 연습하던 것보다 몇 배는 빠르게 열이 응축되는 감각이 손목까지 타고 올라왔다. 짐승이 앞다리를 낮추며 뛰어오를 자세를 취하는 게 눈에 들어왔고, 나는 그것을 짐승의 눈을 향해 내던졌다. 퍼억! 작은 불씨였는데도 짐승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쳤고, 나는 그 틈에 동료를 끌고 골목 밖으로 도망쳤다. 뒤에서 짐승이 낑낑거리며 눈을 앞발로 비벼대는 소리가 들렸는데, 짐승은 더 쫓아오지 않았다. 그건 내 불씨가 위협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놀라서 도망친 거라는 걸 나 자신도 알고 있었다. 만약 저놈이 정말로 이성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놈이었다면, 내 불씨 따위는 우습게 여기고 그대로 달려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나는 뭔가 확신했다. 이 그릇을 계속 키워가면, 정말로 강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이었다. [내구도 -1.2% / 잔여 내구도: 91.4%] 숫자는 확실히 줄고 있었다. 겨우 손끝의 불씨 하나 던지는 데 1.2퍼센트라니, 이런 식으로 계속 쓰다가는 언젠가 밑천이 바닥날 게 뻔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확실한 건, 황립 상급 마법학원 입학시험이 이제 겨우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었고, 그 시험장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 그릇의 진짜 크기를 시험받게 될 예정이었다. 보름. 손가락으로 꼽아봐도 열닷새밖에 안 되는 그 짧은 시간 안에, 나는 종이컵만 한 몸으로 물탱크만 한 그릇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지 증명해야 했다. 그것도 목숨을 깎아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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