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몰락 귀족의 마법서

4화

그날 저녁, 나는 결국 그릇을 예상보다 조금 더 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딱 통과선에 맞춰 힘을 빼는 게 정석이었을 텐데, 훈련용 인형이 생각보다 맷집이 좋았던 탓에, 아니 정확히는 내가 그 인형의 관절부를 몇 번이나 헛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그릇의 뚜껑을 조금씩 더 열어젖히고 있었다. 파직, 하고 손끝에서 마력이 튀는 감각이 들 때마다 나는 속으로 '조금만, 조금만 더' 하고 되뇌었는데, 그게 쌓이고 쌓여서 결국 인형의 몸통에 제대로 한 방을 먹였을 땐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인형이 뒤로 두 바퀴나 굴렀다. 그 결과로 시험은 무난히 통과했다. 문제는 '무난히'의 기준이 내 예상과 감독관들의 채점 기준이 서로 달랐다는 점이었는데, 시험장 게시판에 붙은 명단에서 내 이름이 중위권에 걸려 있는 걸 발견했을 때 나는 잠시 얼떨떨했다. 병약한 하급귀족 출신이 이 정도 점수를 받는다는 게 이례적인 일이라는 걸 나 자신도 알고 있었으니까. ...이거, 너무 잘한 거 아닌가. 순간 그런 불안이 스쳤지만, 딱히 되돌릴 방법도 없었고,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계산해보니 하위권과 중위권 사이의 점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고, 감독관 입장에서는 그저 '컨디션이 좋았던 병약한 학생' 정도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도시 반대편 치안부 청사에서는 이 시험 결과를 두고 전혀 다른 종류의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건 물론 내가 직접 본 게 아니라 나중에 들은 이야기였다. 박도현은 황성 치안부 조사관으로, 삼십 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중급 성결 마법사 지위를 얻은 실력자였고, 노형규 백작의 동생이기도 했다. 그는 평소 마법학원 쪽 데이터를 굳이 직접 들여다볼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날은 마침 상급 마법학원 원장이 개인적으로 부탁한 사안이 있어서 시험 데이터를 검토하고 있었다. 서류 뭉치를 넘기며 하품을 두어 번 참던 그가, 삼백이십일 번 응시자의 방출량 그래프 앞에서 손을 멈췄다. "이 응시자, 측정 초반에는 마력이 거의 감지되지 않다가, 실전 평가 단계에서 갑자기 방출량이 세 배로 튀었습니다" 하고 부하 조사관 하나가 보고했고, 박도현은 그 그래프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미간을 좁혔다. 그래프의 선은 마치 평평한 호수 위에 누군가 돌을 던진 것처럼, 어느 한 지점에서부터 급격하게 치솟아 있었다. "측정 오류일 가능성은?" 하고 그가 되물었다. "장비 세 대에서 동일한 수치가 나왔습니다, 오류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박도현은 잠시 말이 없다가, 서류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이런 식으로 마력이 튀는 경우는 대개 두 가지다. 하나는 금지된 마법 촉진제를 사용한 경우고, 다른 하나는..." 하고 말을 흐리다가,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촉진제라면 사후 검사에서 잔여 성분이 검출됐을 텐데, 이 응시자의 몸에서는 그런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는 게 이미 보고서에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남는 가능성은 하나뿐이었지만, 그건 너무 희귀한 경우라 굳이 상급자에게 보고할 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니,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지, 이 응시자는 하위권 마력으로 등록되어 있어서 어차피 주목받을 대상이 아니다" 라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그래도 보고서에는 남겨둘까요?" 하고 부하가 물었을 때, 박도현은 서류를 서랍 깊숙이 밀어 넣으며 짧게 답했다. "형식적으로만, 특이 사항 없음으로." 이것이 이들의 중론이었다는 게, 나중에 내가 짐작하게 된 사실이었다. 요컨대 치안부는 내 존재를 인지하긴 했지만, 그걸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는 것이었으니, 어쩌면 그게 나에게는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날 박도현이 조금만 더 집요한 성격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태평하게 회상하고 있지 못했을 테니까. 같은 시각,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삯바느질감이 밀려 손끝에 물집이 잡히도록 일하고 계셨고, 밤늦게 방문을 열어보면 늘 좁은 등불 아래 바늘을 쥔 채 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누나는 낮에는 과일가게에서 상한 과일을 골라내다가 밤에는 주점에서 술 취한 손님들의 시비를 받아냈는데, 어느 날은 팔뚝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손님이 넘어지면서 부딪혔어" 라고만 짧게 답하고 넘어갔다.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지만, 캐물어봐야 서로 피곤해질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냥 넘겼다. 나는 그 사이에서 물류창고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매일 밤 조금씩 그릇을 여는 훈련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그릇을 반쯤 여는 것도 버거워서 몸이 후들거렸는데, 며칠이 지나자 그 정도는 숨쉬듯 할 수 있게 되었다. 몸이 적응한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새삼 감탄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다 보니 몸의 상태는 조금씩 나아지는 느낌이었지만, 감각창에 뜨는 내구도 숫자는 여전히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잔여 내구도: 88.9%] 그 숫자를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계산을 했다. 처음 감각창을 확인했을 때가 90퍼센트 초반이었으니, 그 사이 대략 1퍼센트 남짓이 깎여나간 셈이었다. 간단한 계산식이었다. 이 속도라면 몇 년, 아니 몇 개월이나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그 안에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지. 하루에 소모되는 내구도가 훈련 강도에 비례한다면, 무리하게 그릇을 열수록 수명은 더 빨리 줄어들 테고, 반대로 조심스럽게 아끼면 강해지는 속도도 그만큼 더딜 것이었다. 정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굶어 죽는 것보다는 조금씩 강해지며 죽는 게 낫다는 결론에는 쉽게 도달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인생이야, 하고 잠깐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 웃음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중등 마법학원 수업이 끝난 뒤 교문을 나서는 길에, 나는 같은 반 학생인 노진우와 마주쳤다. 그는 정원사의 아들로, 나만큼이나 형편이 어려운 평민 출신이었는데, 평소에는 나를 볼 때마다 손을 번쩍 들고 "태준아!" 하고 크게 부르며 다가오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멀리서부터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 안색이 더 뚜렷하게 보였다. "태준아,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하고 그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는데, 나는 그 목소리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직감했다. 평소 같으면 장난기가 섞여 있어야 할 말투인데, 지금은 그저 힘없이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 있어" 하고 되묻자, 그는 주변을 두어 번 살피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마치 누군가 엿듣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듯한,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어제 저녁에 치안부에 끌려가셨어, 노형규 백작 저택에서 물건이 없어졌는데 그게 아버지 짓이라고..." 하는 말이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한 번 삼켰다. 노형규 백작이라니, 하필이면. 얼마 전 시험 데이터를 검토했던 그 조사관과 형제지간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물론 알 리가 없었지만, 그저 이름만 들어도 뭔가 거대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느껴지는 듯했다. "물건이 없어졌다니, 무슨 물건인데" 하고 물었지만, 노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피했다.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런데 아버지는 절대 그런 짓을 하실 분이 아니야" 라는 말만 반복했는데,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정원사라는 직업 특성상 매일 백작 저택을 들락거려야 했을 테고, 그런 사람의 손발이 묶여버리면 당장 그 집안의 생계 자체가 끊길 판이었다. 그 눈빛에 담긴 절박함이 심상치 않아서 나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뭐든 도울 게 있으면 말해" 하고 말했지만, 사실 그 순간 내가 뭘 도울 수 있을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하급귀족 출신에 병약한 학생 하나가, 백작가와 얽힌 사건에 무슨 힘을 쓸 수 있을까. 그때는 이 사건이 나중에 나 자신까지 삼켜버릴 만큼 커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노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는데, 그 뒷모습이 유난히 작아 보였던 것을 나는 오래도록 기억하게 되었다. 마치 어깨 위에 보이지 않는 짐이 하나 더 얹힌 것 같은, 그런 뒷모습이었다. 그날 밤 물류창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골목 어귀에서 나는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평소라면 노점 상인들이 좌판을 정리하며 떠드는 소리가 들려야 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조용했고, 가로등 불빛이 유난히 어둡게 흔들리고 있었다. 발소리마저 골목에 유난히 크게 울리는 듯해서, 나도 모르게 걸음을 조금 늦췄다. 뭔가 잘못됐다는 감각이, 몸 안쪽 어딘가에서 슬며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순간 감각창에 처음 보는 문구가 떠올랐다. [경고: 강한 마력 반응 감지. 위치 추정 - 인근 200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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