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마녀 저택의 앞치마

3화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나는 마을 외곽의 낡은 정자에 앉아 있었다. 배낭을 옆에 내려놓고 무릎을 세운 채, 검붉은 하늘이 완전히 검게 변하는 것을 지켜봤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가 스산하게 흔들렸다. 정자의 나무 기둥은 오래되어 곳곳이 갈라져 있었고, 손끝으로 만지면 거친 결이 느껴졌다. (오늘 밤은 어디서 자야 하나.) 마을회관에 가볼까 생각했지만, 낮의 반응들을 떠올리면 문을 두드릴 자신이 없었다. 낮에 마주쳤던 사람들의 눈빛이 아직도 선명했다. 경계하는 눈, 피하는 걸음, 애써 못 본 척하는 등. 그 시선들 앞에 다시 서고 싶지 않았다. 허기가 몰려왔다. 아침에 먹은 건 트럭에서 나눠준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주머니에는 얼마 되지 않는 돈이 있었지만, 이 시간에 문을 연 가게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배 속에서 낮게 울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냥 여기서 밤을 보내야 할지도.) 바람이 한 번 더 불었다. 이번엔 조금 더 차가웠다. 그때였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걷는 듯한, 급한 걸음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형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준아!" 낯익은 목소리였다. 박도윤이었다. 청림상단에서 일하는 박도윤은 예전부터 나와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내 앞에 섰다.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찾았다, 다행이다." "도윤이 형."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과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숨을 고르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서둘렀는지 짐작이 갔다. "덕수한테 들었어. 네가 마을에 왔다고." 박도윤이 말했다. "근데 윤아 집에 갔다가... 그냥 나왔다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나도 말해주고 싶었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어." 짧은 정적이 흘렀다. 정자 주변의 풀벌레 소리만 낮게 이어졌다. "그래서 오늘 잘 곳은 있어?"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박도윤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턱을 만지며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그의 시선이 잠깐 허공을 향했다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마을 외곽에 저택 하나가 있는데."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기 사는 사람이 있어. 반년 전부터." "누구요?" "동네에서는 까마귀 마녀라고 불러." 까마귀 마녀. 나는 그 이름을 되뇌었다. (마녀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진짜 이름은 몰라. 아무도 몰라. 검은 옷을 입고, 부리 모양 마스크를 쓰고 다녀." 박도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안경도 항상 쓰는데, 짙은 초록색 유리라서 눈이 안 보여." 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런 사람이 왜 이 마을에.) "그 사람이 왜." "가정부를 구한다는 소문이 있어. 저번에 상단 쪽에 사람을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이 왔었거든." 박도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정체를 몰라서 추천하기가 좀 그랬어. 그런데 지금 네 상황을 보니..."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나는 그의 표정에서 복잡한 감정을 읽었다. 걱정, 그리고 미안함, 그리고 아주 조금의 안도. (이 사람도 나를 마을에서 조용히 사라지게 하고 싶은 건가.)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배 속이 다시 한번 울렸고, 밤바람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가볼게요." 내가 말했다. "당장 잘 곳이 필요해서요." 박도윤은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내가 추천장을 써줄게." 그는 품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어두운 정자 안에서, 그는 무릎을 받침 삼아 몇 줄을 적었다.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손은 익숙하게 움직였다.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정자 안에 낮게 울렸다. 그는 몇 번인가 멈췄다가 다시 이어 쓰기를 반복했다. 무슨 말을 골라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이거 가져가. 그리고..." 그가 종이를 접어 내게 건네며 말했다. "조심해서 대해. 무슨 사람인지 몰라도, 예의는 지켜야 하니까." 나는 추천장을 받아 배낭 속에 넣었다. 접힌 종이의 감촉이 유난히 얇고 가벼웠다. "고마워요, 형." "고맙긴. 미안하지." 박도윤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뭔가 더 있는 듯했지만,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의 눈빛 속에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물을 자리가 아니었다. "저택은 마을 서쪽 끝, 오래된 방앗간 지나서 있어. 어두우니까 조심해서 가." 그는 손짓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쪽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고맙습니다." 나는 배낭을 다시 짊어졌다. 어깨에 걸리는 무게가 낮보다 조금 더 무겁게 느껴졌다. 박도윤과 헤어진 뒤, 나는 어두운 길을 따라 걸었다. 달빛이 흐릿하게 길을 비췄다. 나뭇잎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까마귀 마녀라니.) 걸으면서도 자꾸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부리 모양의 마스크, 짙은 초록빛 안경. 머릿속으로 그려보려 해도 형체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저 검은 그림자 하나가 어렴풋이 떠올랐다가 사라질 뿐이었다. 길가의 가로등은 이미 오래전에 꺼진 듯 녹슬어 있었다. 발밑에서 자갈이 부서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방앗간을 지나자 길이 점점 좁아졌다. 주변에 인가가 드물어졌고, 나무들이 우거져 어둠이 더 짙어졌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치는 바람 소리가 어딘지 낯설게 들렸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소리인데, 오늘 밤은 그 안에 삐걱거리는 듯한 파열음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한참을 걸어가자 저 멀리 불빛 하나가 보였다. 크고 오래된 저택이었다. 담쟁이덩굴이 벽을 타고 올라간 모습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지붕 한쪽이 기울어진 듯 보였고, 창문 몇 개는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불빛은 단 하나, 이층 어느 방에서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문 앞에 서자,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진짜 여기 사는 사람한테 가정부로 써달라고 부탁해야 하나.) 망설임이 몰려왔지만, 등 뒤에는 오늘 밤 갈 곳 없는 현실이 있었다. 나는 배낭끈을 다시 한번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살짝 배어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대문을 두드렸다. 똑똑.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저 멀리서 우는 새 울음소리 하나. 모든 것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러다 안쪽에서 낮고 차분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느리지만 흔들림 없는 걸음.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내 심장 소리도 함께 커지는 것 같았다. 대문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림자의 윤곽이 문 틈새로 어렴풋이 비쳤다. 길게 늘어진 옷자락, 그리고 무언가 뾰족한 것이 얼굴 부근에서 튀어나온 듯한 형체. 나는 숨을 죽인 채 그 순간을 기다렸다. 문고리가 천천히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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