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결월과 눈이 마주친 그 짧은 순간, 서지안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요란하게 재생되기 시작했다.
장면들이었다. 원작 소설의 문장들이 아니라,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선명한 영상이었다. 결월이 계단에서 넘어지는 장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장면, 졸업식에서 홀로 뒷줄에 앉아 있는 장면. 그 뒤로도 장면들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결월이 급식을 혼자 먹는 뒷모습, 누군가 결월의 책상에 낙서를 하고 지나가는 손,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걸어가는 작은 등.
'이게 뭐야.'
입학식이 끝나고 반으로 이동하는 동안, 서지안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신음했다. 두통이 지끈거렸다. 마치 오래된 필름을 억지로 되감아 튼 것 같은 감각이었다. 필름은 뚝뚝 끊기면서도 선명하게 재생되었고, 그 사이사이 잡음처럼 익숙한 문장들이 섞여 들어왔다. 분명 어디선가 읽었던 문장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원작 소설을 읽었던 자신의 기억이 이 세계의 사건과 맞물려 되살아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자면 예지였다. 이미 벌어진 적 없는 미래인데, 그녀는 그것을 마치 과거처럼 알고 있었다. 벽에 손을 짚고 잠시 숨을 고르는 서지안을 지나가던 아이 몇이 힐끗 쳐다봤지만, 서지안은 그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
원래 세계에서 서지안은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여고생이었다. 성적도 중간, 친구도 몇 명 없었고, 부모는 늘 바빴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초, 지독하게 외로운 시기가 있었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텅 빈 교실에 혼자 남아 있던 저녁들, 아무도 연락하지 않는 휴대폰 화면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던 밤들이었다.
그때 우연히 읽기 시작한 것이 '화원에는 꽃이 있다'였다.
인기 순위로 보면 결월은 밑바닥이었다. 팬픽 조회수도 낮았고, 커뮤니티에서 언급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주인공도 아니고, 서브 남주도 아니고, 그냥 배경처럼 지나가는 조연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서지안은 결월을 좋아했다.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도, 누구보다 다정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밤마다 결월의 짧은 대사 몇 줄을 읽고 또 읽으며 잠들었다. 마치 결월이 곁에서 말을 걸어주는 것 같았다. 결월의 대사는 늘 짧았고, 늘 조심스러웠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그 한마디가 서지안에게는 세상 누구의 위로보다 컸다.
'그때 나를 버티게 해준 게 저 애였는데.'
서지안은 책상에 얼굴을 묻고 혼자 중얼거렸다. 짝꿍이 힐끗 쳐다봤지만 무시했다.
지금 그녀는 그 은인이, 이 세계 안에서 원작 그대로 방치되어가는 걸 눈앞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첫날인데도, 이미 결월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삼삼오오 모여 어색한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도, 결월은 혼자 창밖을 보고 있었다.
***
문제는 예지의 정확도였다. 서지안은 쉬는 시간마다 머릿속에서 원작의 장면들을 끄집어내려 애썼지만, 세세한 대사는 흐릿했고 어떤 장면은 아예 뭉개져 있었다.
'큰 사건은 기억나는데, 자잘한 건 왜 이렇게 안 떠오르지.'
마치 오래 전에 딱 한 번 본 영화의 줄거리는 기억하는데, 대사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자신이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던 회차일수록 선명했고, 대충 넘겼던 부분은 아예 백지에 가까웠다. 심지어 어떤 장면은 등장인물의 옷 색깔까지 기억나는데, 그 앞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결월과 관련된 장면들은 유독 선명했다. 서지안이 유독 아껴서 읽었던 캐릭터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다른 인물들의 서사는 뜨문뜨문했고, 심지어 몇몇은 이름조차 가물거렸다.
반 배정표를 확인하던 서지안의 눈에, 익숙한 이름이 하나 더 들어왔다.
한대지. 원작의 명목상 주인공이자, 서지안의 어릴 적 친구로 설정된 남학생이었다. 실제로 교실에 들어서자 창가 자리에서 손을 흔드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짧은 머리에 늘어진 셔츠 소매, 원작 삽화 그대로였다.
"지안아! 여기!"
밝고 경박한 목소리였다. 원작 그대로였다. 주변 아이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큰 목소리였는데도, 한대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서지안은 애써 침착하게 다가가 앉았지만, 머릿속은 이미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대지랑 결월을 어떻게든 이어줘야 해.' 그것이 은혜를 갚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다. 원작에서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장면이 몇 개나 있었는지, 서지안은 손가락을 접으며 세어보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 도서실 배치도를 보러 갔던 서지안은 결월의 이름이 적힌 명단 하나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동아리 명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학 예정자 목록'이었다.
서지안은 그 종이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분명 결월의 이름이었다. 이런 전개는 기억에 없었다. 없었는데.
'이거, 원작에 없던 거잖아.'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