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같은 장면이 벌써 세 번째 떠올랐다.
도서실 구석 자리, 창가 쪽 서가 뒤편. 결월이 그곳에 앉아 있고, 대지가 우연히 책을 찾다 그 자리로 들어오는 장면이었다. 처음 두 번은 흐릿했는데, 세 번째쯤에는 서가에 꽂힌 책 제목까지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여기구나.'
서지안은 확신했다. 원작에서 결월과 대지가 처음 대화를 나누는 장소가, 바로 그 구석 자리였다. 반복되는 예지몽 같은 장면들은, 마치 이 세계가 그 방향으로만 흘러가려 한다는 걸 알려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세 번이나 같은 꿈을 꾸는 게 정상은 아니지.'
하지만 지금 이 몸에 정상적인 게 뭐가 있나 싶기도 했다. 서지안은 그 생각을 애써 접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과 후, 서지안은 도서실로 향했다. 서가를 하나씩 확인하며 위치를 좁혀나갔다. 국어 서가, 사회 서가, 과학 서가를 차례로 지나며 창문의 위치와 서가의 배열을 머릿속 그림과 맞춰보았다.
마침내 창가 쪽 맨 끝 서가 뒤편에서, 낡은 나무 책상 하나를 발견했다. 다른 자리보다 조명이 어두웠고, 먼지도 조금 더 쌓여 있었다. 아무도 잘 앉지 않는 자리라는 뜻이었다.
'딱 여기네.'
꿈에서 본 책상 모서리의 흠집까지 똑같았다. 서지안은 팔에 오소소 돋은 소름을 문지르며 책상 앞에 섰다.
그런데 그 책상 서랍이 살짝 열려 있었다. 안을 들여다본 서지안은 짧게 숨을 삼켰다.
***
서랍 안에는 낡은 공책 한 권과, 누군가 손으로 눌러 접은 종이 몇 장이 들어 있었다. 공책을 펼쳐보니 짧은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오늘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괜찮다. 조용한 게 좋으니까.'
'창밖에 비둘기가 셋. 어제는 둘이었는데.'
서지안은 필체를 보고 바로 알아챘다. 결월의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보여줄 생각 없이 적어놓은, 혼자만의 기록이었다.
글씨는 작고 힘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최대한 자신을 지우려는 듯한 필체였다.
순간 죄책감이 들었다. 남의 일기를 훔쳐본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서지안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 원작의 결말을 바꾸려면, 이 정도의 죄책감은 감당해야 했다.
서지안은 공책을 조용히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접힌 종이는 펼쳐보지 않았다. 그 정도의 선은 지키고 싶었다. 대신 그 자리를 눈에 익혀두었다. '여기가 접점이 될 곳이다.'
다음 날부터 서지안은 틈틈이 그 서가 근처를 오가며, 결월이 정말 그 자리를 자주 쓰는지 확인했다. 예상대로였다. 결월은 매일 방과 후 그 구석 자리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었다.
가끔은 창밖을 오래 바라보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옆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원작 속 결월은 결국 대지를 만나 조금씩 웃음을 되찾는 인물이었다. 지금 저 조용한 뒷모습이, 앞으로는 밝아질 거라고 생각하니 서지안은 묘하게 안심이 됐다.
서지안은 이곳을 자신만의 은신처로 삼기로 했다. 결월과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
계획은 단순했다. 대지를 이 자리로 데려와서,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만드는 것.
'너무 억지스럽지 않을까.'
고민은 잠깐이었다. 서지안은 이미 계획을 짜놓은 상태였다. 책을 찾으러 왔다가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는 척, 딱 그 정도의 자연스러움이면 충분했다.
"대지야, 나랑 도서실 좀 같이 가자." 서지안이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어? 갑자기 왜?" 대지가 눈을 끔뻑였다. 경박한 얼굴에 순수한 당황이 겹쳐 있었다.
"그냥, 책 찾을 게 있어서."
"책? 네가?"
"내가 책 찾는 게 그렇게 이상해?"
"어. 이상해."
서지안은 대지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대지가 "아야"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지만, 별 의심 없이 따라왔다. 서지안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게 시작이야.' 원작의 장면이 그대로 재현될 거라는 기대감이 걸음을 재촉했다.
도서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서지안의 발걸음은 이미 정해진 길을 걷듯 흔들림이 없었다. 서가 사이를 지나면서도 자꾸 곁눈질로 대지의 표정을 살폈다. 대지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책장에 꽂힌 만화책 표지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서가 뒤편에 도착했을 때, 예상대로 결월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결월의 옆얼굴에 얇게 걸쳐 있었다. 서지안은 순간 숨을 멈췄다. '완벽해.'
하지만 상황은 서지안의 예상과 완전히 다르게 흘러갔다.
대지가 불쑥 인사를 건네려는 순간, 결월이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나 책을 챙기더니 서가 사이로 급히 몸을 피해버렸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고, 결월이 놓친 책 한 권이 바닥에 떨어졌다. 대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책을 주워 들었지만, 결월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뭐야, 왜 저래?" 대지가 책을 뒤집어 표지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나 아는 애 아닌데."
서지안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결월이 사라진 서가 틈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결월은 그 자리에 며칠째 나타나지 않았다.
'왜 도망가는 거야.'
서지안은 텅 빈 자리 앞에 서서 멍하니 서 있었다. 매일 확인하러 왔지만 결월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었다. 책상 위에는 먼지만 더 두껍게 쌓여갔고, 서랍 속 공책도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새 문장이 적히지 않은 채였다.
예지몽 속의 장면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마치 그녀 자신의 개입이, 원작의 흐름을 오히려 흔들어놓은 것 같았다.
'이러다 다시는 안 나타나면 어떡하지.'
서지안은 텅 빈 책상을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먼지가 손가락에 하얗게 묻어났다. 원작이 시작되어야 할 자리에서, 이야기는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멈춰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