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흑하 백작가의 가을은 언제나 안개로 시작되었다. 아침마다 저택 동쪽 별채를 감싸는 회백색 안개는 정원사들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어서,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귀한 도련님의 숨결이라 부르며 묘한 경외를 담아 이야기했는데, 그 안개 속에 갇혀 살아온 이서준에게는 그 말이 그저 조롱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가 지금의 몸으로 살아온 시간 내내, 별채의 문은 하루 두 번 식사를 나르는 시녀들이 열 때를 제외하고는 늘 잠겨 있었으며, 창밖으로 정원을 내다보는 것조차 경비병들의 허락이 필요했다는 것을. 보호.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시녀들은 그를 마주할 때마다 눈을 내리깔고 지나치게 공손한 말투로 안부를 물었는데, 그 정중함 속에는 어딘가 사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값을 매길 수 없는 물건을 다루는 듯한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도련님, 오늘은 안색이 좋아 보이시네요. 도련님, 창문은 닫아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밤바람이 차니까요. 그 말들은 언제나 친절했으나 동시에 언제나 그를 방 안에 묶어두는 방향으로만 흘러갔다는 것을, 서준은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으면서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이서준은 문득 예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서른두 살, 야근이 잦은 회사원이었고 별다른 신념도 없이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던 사람이었으나, 어느 겨울밤 골목에서 낯선 남자에게 붙잡혀 소리치는 여자를 보았을 때만큼은 몸이 먼저 움직였다는 것을. 여자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으나,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맞는 것을 방관했던 기억이 그 밑바닥에 있다는 걸 그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골목으로 뛰어들었고, 남자의 손에서 칼이 빠져나오는 것을 보지 못한 채 배를 찔렸으며, 차가운 바닥에 쓰러지면서도 여자가 무사히 도망친 것을 확인하고는 옅게 웃었다는 것을. 신념.
그 한 단어가 그의 마지막이었는데,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이곳에 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런 조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요 며칠 사이 꿈은 유독 선명해졌고 오늘 밤은 아예 잠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릴 만큼 강렬했다는 것을.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창밖의 안개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열여섯 해를 이 방에서, 이 담장 안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는데, 전생의 기억이 또렷해질수록 지금의 삶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틀 속에 갇혀 있었는지가 함께 선명해졌기 때문이었다.
방 안의 물건들을 하나씩 눈으로 훑던 그는 이제껏 한 번도 의문을 품지 않았던 것들이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창틀에는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촘촘한 격자무늬 장식이 박혀 있었는데, 어릴 때는 그것이 그저 고급스러운 세공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종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울려 시녀를 불러들이는 도구였지만, 정작 그가 스스로 방을 나서겠다고 말했을 때 그 종을 울릴 필요가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열여섯 해 동안 단 한 번도.
왜 나는 이 방을 나갈 수 없는 걸까.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백작가의 사람들은 늘 온화한 말투로 도련님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설명했지만, 그 말 속에 담긴 것이 진짜 걱정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그는 이제껏 캐물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을. 어쩌면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면 평생 그 물음조차 떠올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얼마나 순하게 길들여진 짐승처럼 살아왔는지를 실감하며 손끝이 차가워졌다.
오늘 밤은 달랐다.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갔고, 늘 잠겨 있던 발코니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는데, 놀랍게도 문은 아주 쉽게 열렸다. 잠금장치가 낡아 있었던 것인지, 혹은 누군가의 실수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 그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을. 문이 열리는 소리는 생각보다 조용했고, 그 조용함이 오히려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누군가 이 소리를 듣고 달려오지 않을까. 그는 잠시 숨을 멈추고 별채 안쪽의 기척을 살폈으나, 들려오는 것은 안개에 젖은 밤벌레 울음소리뿐이었다.
발코니를 넘어 정원으로 내려서는 그의 심장은 두려움보다 이상한 흥분으로 요동쳤다. 전생에서 그는 늘 남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담장을 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해방감을 주었다는 것을. 안개는 여전히 짙었고, 발밑의 젖은 잔디가 미끄러웠지만, 그는 조금도 멈추지 않고 정원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십육 년 만에 처음으로 스스로 선택한 걸음이었다.
정원의 나무들은 안개 속에서 형체만 어른거렸고, 그 사이로 보이는 저택의 불빛은 하나둘 꺼져 있어 세상이 온전히 잠든 것처럼 느껴졌다. 서준은 그 고요함이 자신을 향한 배려가 아니라 단지 무심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언가 가슴 깊은 곳에서 부풀어 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이것이 자유라는 것일까. 그는 스스로에게 물으며 조금 더 빠르게 걸었는데, 그 물음에 답을 찾기도 전에 그의 세계는 다시 한번 뒤틀리고 말았다.
그러나 해방의 순간은 길지 않았다. 정원 중앙의 분수를 지나는 순간, 사방에서 등불이 켜지듯 갑작스레 불빛이 솟아올랐고, 곧이어 갑주를 걸친 여인들 여럿이 창을 든 채 그를 둘러쌌다는 것을. 규수경비대의 제복이었다. 그는 숨이 턱 막혔고, 손끝이 저절로 떨렸는데, 그것이 두려움이라는 걸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를 둘러싼 여인들의 수는 열을 넘어 보였고, 각기 다른 방향에서 뻗어 나온 창끝이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이서준 도련님이십니까." 앞에 선 대장 격의 여인이 창을 겨눈 채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위협보다도 어이없다는 감정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보다 한 걸음 앞서 서 있었는데, 갑주 위로 드러난 표정에는 오랜 훈련으로 다져진 단단함과 함께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미묘한 짜증이 겹쳐 있었다. "이 시간에 별채를 벗어나신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냥…… 걷고 싶었습니다." 서준은 겨우 대답했는데, 그 말이 얼마나 초라하게 들리는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열여섯 해를 갇혀 살아온 사람의 대답이 그것뿐이라는 사실이 그를 더욱 작아지게 만들었다.
대장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 "걷고 싶으셨다구요." 그녀는 창을 내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본원에 연락해. 국보급 자산이 담장 밖으로 나왔다고." 뒤쪽에 서 있던 젊은 경비 하나가 즉시 몸을 돌려 저택 쪽으로 달려갔고, 그 발소리가 안개 속으로 빠르게 사라져 갔다.
국보급 자산. 그 말이 서준의 귓속에 오래도록 맴돌았다. 그는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세계에 눈을 뜬 이후 처음으로 또렷하게 실감했다는 것을. 자산이라는 단어는 값어치를 지닌 것에게나 붙는 말이었고, 값어치를 지닌 것은 언제나 누군가의 소유였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의 것인가. 그는 그 질문에 답을 찾기도 전에 몸이 먼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안개 속에서 등불들이 하나둘 늘어나며 저택 전체가 깨어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는 방금 자신이 넘은 담장이 사실은 훨씬 더 거대한 벽의 일부였을 뿐이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창을 든 여인들의 대열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그를 향한 시선에는 동정도 분노도 아닌, 그저 익숙한 절차를 수행하는 듯 무심한 냉정함만이 담겨 있었다. 저 멀리서 저택의 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여러 개의 발소리가 안개를 가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