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체육관 매트 위에서 후배 녀석의 목을 팔로 감아 조르던 중이었다. 정확히는 리어 네이키드 초크였는데, 녀석이 손바닥으로 매트를 두드리기 직전까지 팔 각도를 미세하게 조절하며 "그렇지, 거기서 힘 빼면 안 돼" 하고 코치질까지 해가며 여유를 부리던 참이었다. 서른 넘어서까지 이 짓을 하고 있으면 어머니가 살아계셨어도 등짝을 후려쳤을 텐데, 뭐 어쩌겠나, 좋아서 하는 일이었으니까. 관장님한테 월급 받는 것도 아니고 그냥 취미로 다니는 주제에 후배들 코치질까지 하고 있으니 팔자 한번 좋다는 생각을 하던 그 순간, 세상이 갑자기 하얗게 뒤집혔다.
아니, 정확히는 뒤집힌 게 아니라 통째로 지워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는데, 마치 텔레비전 채널이 바뀌듯 시야가 뚝 끊기더니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 느낌이었다. 그 사이에 뭔가 붕 뜨는 감각이나 어지러움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냥 매트가 사라지고, 후배 녀석의 목이 사라지고, 체육관 특유의 땀 냄새와 고무 냄새가 사라졌다. 그리고 눈을 뜨자 대리석 바닥의 서늘한 감촉이 등을 타고 올라왔고, 코끝에는 향냄새인지 뭔지 모를 낯선 향이 감돌았으며, 후배 녀석 대신 웬 낯선 사람들이 나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뭐지, 이거.' 하고 생각할 틈도 없이, 화려한 자수가 놓인 로브를 입은 노인이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와 나를 향해 뭐라고 외쳤는데, 신기하게도 그 말이 한국어로 들렸다. 억양이 미묘하게 어색한 걸 보니 아마 통역 마법인지 뭔지가 걸려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등을 대리석에 붙인 채로 눈만 굴리며 주위를 살폈는데, 천장이 어찌나 높은지 목을 한참 젖혀야 끝이 보일 정도였고, 벽마다 걸린 태피스트리엔 용이니 검이니 하는 그림들이 화려하게 수놓여 있었다. '아, 이거 완전 판타지 소설 삽화네' 하는 생각이 스치는 와중에도 몸은 여전히 바닥에 뻗어 있었다.
"오오, 용사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용사라니. 나는 그 단어를 듣자마자 헛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주변 상황을 보아하니 지금 웃을 타이밍은 절대 아니었다. 넓은 홀 정면 옥좌에는 살집이 넘쳐흐르는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그 인상이 하도 거만해서 자기소개도 듣기 전에 '아, 저 사람이 여기서 제일 높은 놈이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손가락마다 번쩍이는 반지를 낀 것도 모자라 목에는 금목걸이까지 두르고 있어서, 나는 순간 저 인간은 목걸이를 저렇게 화려하게 걸고 다니는데 나는 뭘 걸게 될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가 바로 천화국 국왕 윤태강이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국왕이 묻길래, 나는 얼떨결에 몸을 일으켜 앉으며 "한지훈입니다. 원래는 복싱이랑 레슬링을 하던 사람인데요" 라고 대답했는데, 통역이 이상하게 걸렸는지 신관이 옆에서 두 손을 번쩍 들며 "복싱 전사, 복전! 하늘이 내린 이름이로다!" 라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나는 그 순간 뭔가 항의하고 싶었지만 입만 뻐끔거렸다. 지훈이 복전이 되는 이 놀라운 언어유희 앞에서, 그것도 진지한 얼굴로 감탄하는 신관들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나. 그날부터 나는 이 세계에서 '복전'이라 불리게 되었다. 내 이름이 지훈인데 복전이라니, 시작부터 뭔가 단단히 꼬였다는 예감이 들었다.
예감은 곧 확신이 됐다. 신관 둘이 다가와 은빛으로 빛나는 목걸이를 내 목에 씌우려 하길래,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막았는데, 그 순간 시야 한켠에 처음 보는 창이 떠올랐다.
[예속의 목걸이 장착이 시도됩니다.]
[거부권이 없습니다.]
'거부권이 없다니, 되게 당당하게 말하네. 무슨 회원가입 약관도 아니고.' 하는 생각과 동시에 목걸이는 이미 내 목을 감고 있었다. 신관 하나가 손을 내밀어 내 팔을 슬쩍 붙잡는 순간, 다른 하나가 재빠르게 목걸이를 채운 것이었는데, 저항할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차가운 감촉이 살갗에 닿는 순간 딸깍, 하는 작은 소리가 나며 잠금장치가 걸렸다.
[숙주 정보: 한지훈]
[예속의 목걸이가 정상적으로 장착되었습니다.]
[왕실의 명령에 불복종 시, 목걸이가 즉시 발동하여 숙주를 처형합니다.]
처형이라는 두 글자가 시야에 둥둥 떠 있는 걸 보면서, 나는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와, 이건 뭐 입사 첫날부터 사직서 대신 사형 집행문을 받은 기분인데.' 손끝으로 목걸이를 슬쩍 만져봤는데, 생각보다 얇고 가벼운 게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이렇게 가벼운 게 사람 목숨을 좌우한다니. 국왕은 내 웃음을 오해했는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용사여, 그대는 앞으로 국경 전선에서 마물들과 싸워 이 나라를 지키게 될 것이다. 마력을 각성시켜 최강의 전사로 다시 태어나거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대충 정리가 됐다. 요컨대 나는 이세계로 강제 소환되어, 목에 처형 장치를 걸고, 전쟁 도구로 쓰이기 직전인 상태였다. 스물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후배 목이나 조르며 살던 사람이 갑자기 국가 소유의 전투 자원이 됐다는 게, 솔직히 말이 되나 싶었다. 회사에서 계약서 한 장 없이 사람을 끌고 와서 부려먹으면 노동청에 신고감인데, 여긴 노동청은커녕 도망칠 곳도 없어 보였다.
"저기, 잠깐만요" 하고 손을 들어 말을 끊으려 하자, 옆에 있던 갑옷 입은 사내가 눈을 부라리며 창을 내 목에 들이댔다. 창끝이 목젖 바로 앞에서 멈췄는데, 그 거리가 어찌나 정교한지 이 사람이 이런 걸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라는 게 대번에 느껴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가 기사단장 백강호였는데, 첫인상부터 성질이 급해 보이는 게 딱 그 이름값을 하는 인물이었다.
"왕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하고 그가 으르렁거리듯 말했고, 나는 그 살벌한 눈빛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걸 몸으로 느낀 건 그 순간이 처음이었는데, 목걸이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감촉이 목덜미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마치 '한 마디만 더 해봐라' 하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그 진동이 얼마나 정직하게 위협적이었던지, 나는 순간 이 목걸이가 나보다 내 목숨을 더 잘 관리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결국 나는 별다른 저항 없이 병사들에게 끌려 나갔다. 양옆에서 팔을 붙든 병사들의 손아귀 힘이 상당해서, 도망칠 생각을 접은 지 오래인데도 굳이 저렇게 세게 잡을 필요가 있나 싶었다. 화려한 궁전 복도를 지나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몇 층이나 내려간 끝에, 눅눅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숙소 같은 곳에 도착했는데, 계단을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벽에 걸린 횃불 간격이 뜸해지고 공기가 서늘해지는 게, 위층의 화려함과는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안에서 낯익은 언어가 들려왔다.
"...한국어?"
구석에 앉아 있던 남자애 하나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교복 비슷한 걸 입고 있었는데 이미 다 해져서 원래 색깔을 짐작하기도 힘들었고, 목에는 나와 똑같은 목걸이가 채워져 있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여자애도 고개를 들었는데, 역시 목에 목걸이를 하고 있었고 눈빛이 유난히 지쳐 보였다. 두 사람 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는데, 그 자세가 하도 익숙해 보여서 이 방에서 얼마나 오래 저러고 있었을지 짐작이 갔다.
"저기... 혹시 한국분이세요?" 하고 남자애가 조심스럽게 물었고, 나는 그제야 안도감 비슷한 걸 느꼈다. 적어도 이 낯선 세계에서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게, 지금 상황에서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어, 나 한국 사람 맞아. 이름은 한지훈이야." 하고 대답하자, 남자애가 벌떡 일어나며 "저는 박영태예요, 여기 온 지 열 달쯤 됐어요" 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옆에 있던 여자애도 "정홍담이에요" 하고 작게 인사를 건넸는데, 그 목소리에 묻어 있는 피로감이 예사롭지 않았다. 앉은 자세로 살짝 고개만 숙이는 인사였는데, 그마저도 기운을 짜내는 것처럼 보였다.
'열 달이나 여기서 버텼다고?' 하는 생각에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겉모습만 봐도 고등학생 정도로 보였는데, 그 나이에 이런 곳에서 목걸이를 차고 버텨왔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열 달이면 삼백 일이 넘는 시간인데, 그 시간 동안 이 어린애들이 대체 무슨 일을 겪었을지 생각하니 속이 좀 갑갑해졌다.
"여기, 되게 위험한 곳이에요" 하고 영태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절대로 여기서... 아저씨처럼 왕 앞에서 반항하는 티 내면 안 돼요. 지난번에 그렇게 했던 사람이..."
영태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복도 저편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옷 부딪히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그 소리를 듣자마자 영태와 홍담의 얼굴이 동시에 하얗게 질리는 게 보였다. 영태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어버렸고, 홍담은 아예 시선을 바닥으로 떨궈버렸는데, 그 반응 자체가 뭔가를 웅변하고 있었다. 이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든, 결코 좋은 소식을 들고 오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