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사슬을 부수는 주먹

4화

사흘 뒤, 왕실 공인 대련장은 연무장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화려했다. 원형 경기장을 둘러싼 관중석에는 귀족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값비싼 옷을 걸치고 부채를 팔랑이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마치 오페라 관람이라도 온 것 같은 여유가 넘쳤다. 정면 특별석에는 국왕 윤태강과 왕녀 윤서하가 나란히 자리했고, 그 아래로는 각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이거 완전 콜로세움 급이잖아.'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규모가 상당했는데, 그만큼 이 대련에 걸린 이목도 만만치 않다는 뜻이었다. 대기실에서 경기장으로 걸어 나오는 그 짧은 통로에서, 나는 새삼 이 세계의 스케일을 실감했다. 통로 양옆으로 늘어선 병사들의 창끝이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였고, 관중석에서는 이미 내 이름을 두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자가 그 노예 출신이라는?" "설마 백강호 경의 정예를 상대로 버틸 수 있겠나." 하는 식의, 기대보다는 조롱에 가까운 시선들이었다. '뭐, 어차피 결과로 보여주면 되는 거니까.' 하고 나는 속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공인 대련은 등급 판정 마법진 위에서 진행된다." 하고 진행을 맡은 노기사가 설명했다. "승패와 무관하게, 대련 중 발휘된 전투력을 마법진이 측정하여 F부터 S까지 등급을 매긴다.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S등급을 받은 자는 없었지." 노기사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는데, 마치 수백 번은 반복했을 법한 설명을 기계적으로 읊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억양 없는 말투 속에서도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났는데, 아마 이 마법진 자체가 이 나라의 자랑거리이기 때문이겠거니 싶었다. 'S등급이 최고인데 아무도 못 받았다고? 그럼 대충 A등급 정도만 받아도 나쁘지 않겠네.' 하고 나는 속으로 계산을 하며 마법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발밑에서 은은한 빛이 원형으로 퍼져 나가는 게 느껴졌는데, 마치 발바닥에 미지근한 물이 닿는 듯한 감각이었다.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런 걸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낸 이 세계의 마법 기술에 소름이 돋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상대는 백강호가 직접 추천한 정예 기사였는데, 갑옷 위로도 단단한 근육이 티가 날 만큼 다부진 체격이었다. 어깨 폭만 봐도 내 두 배는 될 것 같았고, 걸음걸이 하나에도 오랜 수련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기사단 부단장 최윤도라고 한다. 봐줄 생각은 없으니 각오해라." 하고 그가 진검을 뽑아 들며 말했는데, 그 눈빛에서 진짜 살기가 느껴졌다. 검날에 비친 햇빛이 유난히 날카롭게 반짝였다. '아, 이건 진검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자 살짝 긴장감이 올라왔다. 목검이나 죽도가 아니라 진짜 사람을 벨 수 있는 쇳덩이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났다. 하지만 나는 곧 격투 신경이 강화된 몸의 감각을 믿기로 했다. 이 몸에 들어온 이후로 몇 번이고 확인했던, 상대의 움직임을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읽어내는 그 이상한 감각을. '어차피 안 믿으면 죽는 거고, 믿으면 사는 거니까.' 하는 자조 섞인 결론에 다다르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심판의 신호와 함께 최윤도가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고, 나는 그 궤적을 눈으로 정확히 따라가며 몸을 살짝 비틀어 피했다. 검 끝이 스치는 바람이 뺨을 훑고 지나갔는데, 그 서늘한 감각이 오히려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어줬다. 콰크작!!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귀를 스쳤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상대의 팔목을 붙잡아 비틀며 몸을 회전시켰다. 프로레슬링에서 흔히 쓰는 암 드래그 동작이었는데, 최윤도의 몸이 붕 뜨더니 그대로 모래바닥에 처박혔다. 부우욱!! 모래가 파이며 튀는 소리와 함께, 최윤도는 잠시 정신을 못 차리는 듯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당혹감과 굴욕감이 뒤섞여 있었는데,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당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관중석은 완전히 침묵에 잠겼는데, 그 정적이 오히려 이 대련의 파급력을 실감케 했다. 부채질 소리조차 멈춘 듯한 그 순간, 나는 오히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너무 조용한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등급 판정 마법진이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전투력 측정 완료.] [등급: S+] [경고: 이는 천화국 건국 이래 최초의 S등급 이상 판정입니다.] '...뭐?' 하는 생각과 함께 눈앞의 문구를 다시 확인해봤는데, 확실히 S+라고 적혀 있었다. 최고 등급이 S인 줄 알았더니 그 위에 S+라는 등급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걸 사상 최초로 받았다는 게 더 어이가 없었다. '...개사긴데?' 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뻔했다. 잠깐 동안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해봤다. 노예 신분으로 끌려와서 목숨 걸고 싸운 대가가 겨우 등급 하나 올라가는 거라면 억울할 법도 한데, 그와 동시에 이 등급이라는 게 앞으로 내 목숨줄과 직결될 거라는 계산도 함께 섰다. '요컨대, 강해 보일수록 함부로 죽이기 아까워진다는 거지.' 하고 나는 나름의 생존 전략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관중석에서 폭발적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S플러스라니, 저게 정말 사람이 맞나?" 하는 소리부터 "용사가 정말 강림한 것이다!" 하는 흥분한 외침까지, 경기장 전체가 순식간에 열기로 가득 찼다. 부채를 팔랑이던 귀족들은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나 서로 뭐라고 떠들어댔고, 몇몇은 아예 눈물까지 글썽이며 손을 모으고 있었다. 백강호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추천한 정예 기사가 이렇게 순식간에 나가떨어질 거라곤 상상도 못 한 표정이었다. 국왕 윤태강은 옥좌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과연 진정한 용사로다! 오늘부로 복전을 왕실 직속 전사로 임명한다!" 그 선언에 경기장은 또 한 번 함성으로 뒤덮였다. 나팔 소리까지 울려 퍼지는 걸 보니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꽤나 대단한 의미를 가진 임명식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그 열기 한복판에서 오히려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임명은 무슨, 그냥 노예 등급이 하나 올라간 거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겉으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는 건 손해라는 걸 이미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으니까. 표정 하나로 값이 매겨지는 세상에서, 웃는 얼굴은 곧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특별석에서 왕녀 윤서하가 나를 향해 박수를 치며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 대련 전보다 한층 더 깊어진 흥미로 반짝이고 있었다. 손끝으로 부채를 톡톡 두드리는 그 여유로운 손짓과는 달리, 눈동자만큼은 마치 먹잇감을 관찰하는 사냥꾼처럼 나를 훑고 있었다. '저 눈빛, 아무래도 좋은 신호는 아닌데.' 하는 예감이 스쳤다. 지금까지 봐온 왕녀의 태도로 미루어 보건대, 저런 눈빛 뒤에는 반드시 뭔가 계산이 숨어 있었다. 대련이 끝난 뒤, 나는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대련장 뒤편 대기실로 이동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관중들의 시선이 등 뒤에 따갑게 꽂히는 게 느껴졌는데, 조금 전까지의 조롱 섞인 수군거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경외에 가까운 웅성거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태세 전환이 어찌나 빠른지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간사함이 지금 이 순간 나를 살리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대기실 안으로 들어서자 온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게 딱히 부상 때문이 아니라 그냥 신경이 곤두섰다가 갑자기 풀려서 그런 것 같았다. 마치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활시위가 갑자기 툭 끊어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잠시 천장을 바라봤다. 벽에 걸린 낡은 방패며 녹슨 창들이 이 대기실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듯했다. 대기실 문이 열리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순간,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땀에 젖은 옷이 살갗에 달라붙는 느낌이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살아있다는 감각만큼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복전님" 하는 목소리에 눈을 뜨자, 대기실 문 앞에 왕녀 윤서하가 서 있었다. 시종도 없이 혼자였는데, 그 사실이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보통 이런 신분의 사람이 움직일 때는 최소한 시녀 두엇은 따라붙기 마련인데, 그마저도 없이 혼자 이 후미진 대기실까지 걸어왔다는 건 뭔가 은밀한 용건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 사람, 혼자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뭘까.' 하고 생각하는 사이, 그녀가 천천히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걸음걸이는 우아했지만 그 안에 숨은 목적성만큼은 뚜렷하게 느껴졌다. "오늘 대련,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저와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그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거절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함이 그 아래 깔려 있었다. 나는 젖은 이마를 슥 훔치며 그녀를 바라봤다. '거절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지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왠지 모르게 이 대화가 앞으로의 내 처지를 크게 뒤흔들어놓을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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