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인형사와 침묵한 죄인

1화

후원의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연못은 오늘도 잔잔했다. 물비늘이 오후 햇살에 부서지는 걸 보면서도 나는 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는데, 해가 저 나무 끝에 걸리면 그때부터 세 시간, 그리고 저녁 알현이 시작된다는 계산이었다. 딱 세 시간 남았다. 세 시간이면 충분한가, 부족한가. 계산은 이미 수십 번도 더 해봤는데 답은 매번 똑같았다. 부족해도 해야 한다는 것. "영애님, 차가 다 식었어요." 시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찻잔을 새로 채워 넣었지만 나는 웃는 낯으로 고개만 끄덕였을 뿐 손을 대지 않았다. 이 차를 마실 여유가 지금 내게 있나. 세 시간 뒤 나는 국왕 앞에서 왕태자의 목줄을 잡아당길 참인데, 이런 걸 여유롭게 마시고 있으면 그게 정상인가 싶었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김이 하늘하늘 흔들리다 사라지는 걸 보고 있자니, 저 김처럼 내 목숨도 한 순간에 흩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쾌한 상상은 아니었다. 다과회에 초대된 다른 영애들은 시시콜콜한 혼담 이야기며 신전에서 새로 각성했다는 성녀 이야기로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 성녀님이 그렇게 미인이시라던데요." "저도 들었어요, 평민 출신인데도 태자 전하께서 직접 신경을 쓰신다고." 그 말을 흘려듣는 척하면서 나는 속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태자가 신경 쓴다는 말이 나올 정도면 그 관심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갔다. 나는 그 사이에서 완벽하게 순종적인 공작 영애의 미소를 유지하는 데만 집중했다. 겉으로는 우아하게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소매 안에 감춰둔 서류 뭉치의 두께를 손끝으로 계속 확인하고 있었다. 두 달 동안 목숨을 걸고 모은 증거였다. 왕실 창고의 밀 비축량이 장부상으로는 산더미인데 실제로는 텅텅 비어 있다는, 그러니까 왕태자 이헌과 그 측근들이 백성의 곡식을 빼돌려 어딘가로 팔아넘기고 있다는 증거. 이 서류 한 장 한 장을 얻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창고 관리인을 매수하는 데 든 돈은 내 개인 재산의 절반이었고, 문서를 몰래 베껴 오는 과정에서 하마터면 발각될 뻔한 적도 두 번이나 있었다. 그때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오는 기분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감각이 똑같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은유 영애, 안색이 좀 안 좋아 보이시네요." 옆자리의 영애 하나가 걱정스러운 척 물었지만 나는 그게 진심 어린 걱정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궁 안에서 진심 어린 걱정을 받아본 게 언제였더라. 아마 소림 말고는 없었을 거다. "괜찮습니다, 그저 저녁 알현이 조금 긴장돼서요."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는데, 사실 나는 긴장한 게 아니라 흥분해 있었다. 드디어, 라는 말이 목구멍 안쪽에서 계속 맴돌았다. 이 말을 입 밖에 냈다간 당장 정신병자로 취급받겠지. 속으로만 되뇌는 게 낫다. 왕태자 이헌과 나는 원래 정혼 관계였다. 어릴 때부터 정해진 혼약이었고, 나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으며, 적어도 반년 전까지는 이 결혼이 그럭저럭 무난하게 흘러갈 거라고 믿었다. 가끔 다정한 말을 건네는 사람이었고, 정치적으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여겼다. 그런데 변경 순찰에서 목격한 그 광경, 아이 하나가 굶어서 배가 볼록하게 부은 채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던 그 모습을 본 순간부터 나는 이 결혼도, 이 왕가도 더는 무난하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 아이의 눈.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던 그 눈동자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나는 몰래 울었다. 공작 영애가 그런 걸로 울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나는 이헌의 측근들이 관리하는 창고 장부를 캐기 시작했다. 복수라기보다는, 이건 최소한의 도리였다. "영애님."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부른 건 내 곁을 십 년 넘게 지킨 시녀 소림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었는데,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찻잔을 슬쩍 내려놓았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감이 왔다. 소림이 이런 표정을 짓는 건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십 년을 함께한 사람이 이 정도로 굳어 있다면, 사소한 일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잠시 자리를 비켜도 될까요?" 다른 영애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정자를 벗어나자마자 소림이 내 팔을 붙잡았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영애님, 오늘 알현은 위험합니다." 소림이 속삭이듯 말했고, 나는 그 말투에서 이게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위험한 건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준비한 거고요." 나는 소매 안의 서류를 다시 한번 매만지며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이런 반응이 긴장이라는 건가, 아니면 두려움인가. 구분이 잘 안 됐다. "그게 아니라요." 소림이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더 낮췄다. "태자 전하께서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아요. 영애님이 뭔가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걸." 그 말이 귓속으로 파고드는 순간 나는 걸음을 멈췄다. 하늘이 노래지는 느낌이 이런 건가, 온몸의 피가 발끝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지? 두 달간 그렇게 조심했는데. 창고 관리인도, 서류를 베껴온 서기도, 심지어 내 방 하녀들까지 다 입단속을 시켰는데.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지만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소림은 고개를 저으며 자기도 자세한 건 모른다고 했지만, 요 며칠 태자궁 쪽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덧붙였다. "며칠 전부터 태자궁 시위대가 평소보다 두 배는 늘었어요. 그리고 어제는 재무관이 태자 전하께 불려가서 한참을 있다 나왔다는데, 그 표정이 사색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재무관이라면 창고 장부와 직결되는 인물이었다.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훅 지나갔다. "그리고 성녀님도 오늘 알현에 함께 오실 거라는 얘기가 있어요." 성녀.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두 번째로 걸음을 멈췄다. 요즘 신전에서 화제인 그 평민 출신 각성자, 한소은. 백성들 사이에서 자비의 상징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다는 그녀가 왜 오늘 알현에 나온다는 건가. 설마, 라는 말이 입안에서 씁쓸하게 맴돌았다. 이헌이 나를 상대로 뭔가 준비했다면, 성녀는 거기 쓰일 도구일 가능성이 컸다. 자비의 상징이라는 존재를 방패처럼 세워두고, 나를 밀 비축량 따위를 트집 잡는 몰인정한 여자로 몰아세울 그림이 눈앞에 그려졌다.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영애님, 오늘은 그냥 넘기시는 게 어떨까요." 소림이 애원하듯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두 달의 각오가, 그 굶주린 아이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 떠올라 도저히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이미 늦었어요. 이 증거를 갖고 있는 이상 저는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되돌아갈 곳도 없었고. 이대로 서류를 다시 감춰두고 아무 일 없었던 척 살아간다면, 나는 그날 그 아이의 눈을 두 번 다시 마주할 수 없을 것이다. 살아있는 한 그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할 텐데, 그럴 자신이 없었다. 나는 서류 뭉치를 다시 한번 확인하며 정자로 돌아갈 발걸음을 옮겼다. "영애님." 소림이 뒤에서 다시 나를 불렀다. 이번엔 목소리가 조금 더 다급했다. "혹시라도 오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목숨보다 중요한 정의는 없습니다." 소림의 그 말에 나는 잠깐 멈춰서 그녀를 돌아봤다. 십 년 넘게 나를 지켜준 그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알아요. 나도 죽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니에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정말로 여의치 않은 상황이 오면 나는 무리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해는 이미 나무 끝에 걸려 있었다. 세 시간이 아니라 두 시간, 아니 한 시간 반쯤으로 줄어 있는 걸 깨달은 순간 나는 조금 더 서둘러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준비는 끝났고 증거는 완벽한데, 소림의 그 굳은 얼굴이 자꾸 뒷목을 잡아당기는 기분이었다. 완벽한 증거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이헌이 이미 알고 있다면, 내가 준비한 것들이 다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인데. 정자로 돌아가는 길, 저 멀리 태자궁 방향에서 화려한 마차 한 대가 궁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금박으로 장식된 문양이 오후 햇살에 반짝였는데, 저 정도로 화려한 마차를 탈 수 있는 사람이 이 왕궁 안에 몇이나 될까. 저건, 성녀의 마차인가. 이헌이 정말 성녀를 오늘 알현장에 끌어들일 생각이라면, 이건 단순한 대응이 아니라 미리 짜놓은 함정일 가능성이 컸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이런 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인가 보다, 그런데도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멈추면 그동안의 모든 것이, 그 위험을 감수했던 밤들이, 배가 부은 채 쓰러져 있던 그 아이의 얼굴이 전부 헛것이 되어버릴 테니까. 마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한 채, 나는 다시 정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반. 그 안에 내가 무엇을 더 준비할 수 있을지, 아니면 이미 늦은 건 아닐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엉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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