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추방됐더니 만능설계사라니

1화

집사의 발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규칙적이었다. 너무 규칙적이어서 오히려 불길했다. 문이 열렸다. "아홉째 도련님, 후작님께서 부르십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읽고 있던 마법 이론서를 덮었다. 이해도 못 하는 책이었다. 그래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뭐라도 붙잡고 있어야 했다. 심장이 먼저 알아챘다. 좋은 일로 부르는 게 아니었다. 이 저택에서 아버지가 나를 부른 건 세 번뿐이었다. 태어났을 때 한 번. 다섯 살 때 인장 감별식에서 한 번. 그리고 지금. 세 번 다 좋은 기억이 없었다. 복도를 걸었다. 발밑에서 나무 바닥이 삐걱였다. 집사는 앞서 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등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도 알고 있겠지. 나만 모르는 무언가를. 후작의 서재는 언제나 차가웠다. 벽난로가 있어도 그랬다. 장작이 타는 냄새와 서늘한 공기가 늘 어색하게 섞여 있었다. 나는 문 앞에 섰다. "들어오라." 낮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온기가 섞인 적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선우 후작은 책상 너머에서 나를 보지도 않았다. 서류를 넘기는 손끝만 움직였다. 손가락 마디가 굵었다. 검을 쥔 손이었다. 검술로 후작위를 지킨 사람의 손. 여덟 명의 형들이 양옆에 늘어서 있었다. 첫째 형부터 여덟째 형까지, 순서대로. 다들 표정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다. 셋째 형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저 입꼬리가 곧 웃음으로 터질 것을 알았다. "진." 아버지가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십구 년 만이었다. 십구 년. 그 숫자가 머릿속에서 이상하게 크게 울렸다. 지금까지 아버지는 나를 "아홉째"라고만 불렀다. 이름조차 없는 존재처럼. "너는 무(無)의 인장을 가졌다." 아버지의 손가락이 서류 한 장을 짚었다. 내 감별 기록이었다. "1급도, 5급도 아니다." "아무것도 없어." 그 말이 서재 안에 떨어지자, 벽난로의 불씨가 유난히 크게 타는 소리를 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전생의 기억이 있었다. 서울 어느 회사의 사무실. 칸막이 너머로 들리던 키보드 소리. 엑셀 파일과 야근과 프라모델 조립. 퇴근길 편의점에서 사 먹던 삼각김밥. 서른여섯 살에 갑자기 눈을 감았고, 눈을 떴을 때는 이 몸이었다. 귀족가의 아홉째. 마력 없는 아이. 이름은 같은 '진'이었다. 그것만이 유일한 우연이었다. 그 기억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 세계에서 마력이 없다는 건,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 가축보다 조금 나은 대우. 그게 딱 맞는 표현이었다. "설한촌으로 보낸다." 서재 안이 조용해졌다. 형들 중 하나가 픽 웃었다. 둘째 형이었다. 그는 웃음을 참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설한촌. 북방 변경의 끝. 지도에서 가장 구석에, 가장 작은 글씨로 적힌 이름. 작년 겨울, 얼어 죽은 사람이 서른 명이 넘는다는 곳. 올해도 벌써 다섯이 죽었다고 들었다. 그것도 벌써 초겨울에. "그곳이라면 네 무능함도 눈에 띄지 않겠지." 아버지가 말했다. 말투에 조롱조차 없었다. 그냥 사업상의 결정을 통보하는 말투였다. 불필요한 재고를 처분하는 말투. 손끝이 차가워졌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그런데도 나는 서 있었다. 서 있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언제 떠납니까." 내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떨리지 않아서 오히려 이상했다. "내일 새벽." 그게 전부였다. 아버지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이제 그의 시야 안에 없는 존재였다. 형들의 시선이 등 뒤에 꽂히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는 동정, 누군가는 안도, 누군가는 순수한 즐거움. 나는 그 시선들을 다 등에 지고 서재를 나왔다. 문이 닫혔다. 그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오후 3시 17분. 방으로 돌아와 짐을 쌌다. 짐을 싸는 손이 떨렸다. 옷 몇 벌, 낡은 스케치북 하나. 전생의 습관이 남아, 아직도 무언가를 그리는 걸 좋아했다. 회사에서도 그랬다. 회의가 지루하면 노트 귀퉁이에 낙서를 했다. 스트레스가 심하면 밤새 프라모델 설계도를 들여다봤다. 손을 움직이면 머리가 조금 잠잠해졌다. 쓸모없는 습관이었다. 이 세계에는 마력이 있고, 도면이 있을 자리는 없었다. 그래도 챙겼다. 버리지 못했다. 가방을 정리하는데 손이 자꾸 멈췄다. 설한촌. 얼어 죽은 서른 명. 올해 벌써 다섯. 숫자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노크도 없이. "도련님." 홍다은이었다. 긴 밤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채, 짐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그 보따리가 제법 컸다. "저도 같이 갑니다." "안 돼." 나는 즉시 말했다. "그곳은 사람이 죽는 곳이야." "알아요." "알면서 왜." "그러니까 가야죠." 다은이 웃었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 웃었다. 그 웃음이 화가 났다. 동시에, 이상하게도 안도가 됐다. 그 두 감정이 동시에 있다는 게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됐다. "도련님 혼자 보내면, 저 혼자 여기서 뭘 하겠어요." "여기서 편하게 살면 되잖아. 이 저택엔 적어도 벽난로가 있어." "벽난로보다 도련님이 더 필요해요." 말도 안 되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는 도련님이 태어났을 때부터 옆에 있었어요. 이제 와서 떨어질 생각 없어요." 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은은 벌써 짐을 마차 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등을 보이며 걷는 그 뒷모습이 단호했다. 말릴 틈도 주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전생에서도 이렇게 하루아침에 인생이 뒤집힌 적이 있었나. 회사가 갑자기 부도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그때는 살아 있었다. 다음 날 새벽 5시. 마차는 성문을 나섰다. 배웅하는 사람은 없었다. 형들도, 아버지도 나오지 않았다. 집사만 잠깐 문 앞에 서 있다가, 우리가 마차에 오르자 곧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 바퀴가 돌 위를 지나며 삐걱였다. 그 소리를 들으며 저택이 멀어지는 걸 봤다. 십구 년을 산 곳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느껴야 하는데, 느껴지지 않았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건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처음엔 가볍게 흩날리는 정도였다. 그러다 오후가 되면서 점점 굵어졌다. 마차 바퀴가 눈길에 자꾸 미끄러졌다. 마부가 욕설을 뱉었다. "이러다 밤 되기 전에 못 도착합니다." 나는 창밖을 봤다. 하얀 벌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도, 집도, 사람도. 세상에 우리 마차 하나만 남은 것 같았다. 다은은 담요를 두 개 꺼내 하나를 내게 건넸다. "도련님, 이거 덮으세요." "너도 추울 텐데." "저는 괜찮아요." 빤히 봐도 얼굴이 하얗게 얼어 있었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래도 다은은 웃었다. 그날 밤, 마차가 눈보라 속에 멈춰 섰다. 바퀴가 눈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마부가 몇 번이나 마차를 밀어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밤을 그 자리에서 나기로 했다. 다은과 나는 마차 안에서 몸을 붙였다. 서로의 체온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손이 떨렸다. 입김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창문 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그 바람 소리가 마치 짐승의 울음 같았다. 무언가 해야 했다. 그런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마력도 없고, 검술도 모르고, 이 세계의 생존법도 몰랐다. 전생의 지식은 여기서 아무 쓸모가 없었다. 엑셀 함수가 눈보라를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스케치북을 꺼냈다. 그냥, 손이 심심해서였다. 전생에도 그랬다. 불안하면 뭔가를 그렸다. 그게 유일하게 몸에 남은, 내가 나를 다스리는 방법이었다. 다은이 옆에서 잠깐 눈을 감았다. 지쳐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흘끔 보고, 다시 종이로 시선을 돌렸다. 펜을 쥔 손끝이 얼어서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선을 그었다. 의미 없는 선이었다. 그냥 손이 가는 대로. 그런데 종이 위로, 내가 그리지 않은 선이 겹쳐서 떠올랐다. 숨을 멈췄다. 눈을 비볐다. 환각인가 싶었다. 그런데 사라지지 않았다. 낡은 종이 위에 낯선 문양이 빛났다. 금빛이었다. 내가 아는 어떤 마법 문양과도 달랐다. 책에서 본 적도 없는 형태였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다은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마차 안, 오직 우리 둘뿐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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