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칼날이 은발 소녀의 목에 닿아 있었다.
박거석이 웃었다. 대머리에 맺힌 땀이 번들거렸다.
다가오면 이년 목부터 딴다.
기사 견습생이 검을 늦게 세웠다. 자경단 스무 명은 뒤에서 창을 쥐고도 움직이지 못했다.
선우결은 그 뒤편에 서 있었다.
청하 백작가 장남이라는 자리, 훈련 명목의 순찰 동행. 그게 지금 이 몸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였다.
낫같이 굽은 산도, 불타는 초가지붕, 코를 찌르는 매연.
발밑에는 부서진 항아리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누군가 도망치다 떨어뜨린 짐 보따리도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이런 걸 실전이라고 부르는구나.
선우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국에서는 이런 장면을 게임 로딩화면으로만 봤다. 지금은 로딩이 없었다. 죽으면 그냥 죽는 거였다.
산적들 숫자를 눈으로 셌다. 열넷, 아니 열다섯. 두목까지 합치면 열여섯. 자경단 스물이면 숫자는 이쪽이 우세한데도,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인질 하나가 죽으면 나머지 열아홉이 무슨 소용인가.
뭐라도 해야 하는 것 같은데.
허리춤의 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낡은 손잡이, 칼자루에 흐릿하게 새겨진 글자. 클라우솔라스. 아버지가 물려줬다는 말만 들었지,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는 몰랐다. 그냥 가문의 상징 같은 거라고만 알고 있었다.
손이 저절로 검에 닿았다.
이상하게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미묘했다. 차가운데 뭔가 맥동하는 느낌.
견습 기사가 낮게 말했다.
지원군 올 때까지 버텨야 합니다.
버티다가 저 여자애 죽으면요.
선우결이 되물었다.
견습 기사의 얼굴이 굳었다. 답을 못 했다.
박거석이 칼끝을 더 밀어 넣었다. 은발 소녀의 뺨에 핏줄기가 그어졌다.
소녀의 눈이 선우결을 향했다. 도와달라는 말도 못 하고, 그냥 눈으로만 애원했다.
새하얀 은발이 그을음에 반쯤 검게 물들어 있었다. 나이는 열다섯이나 됐을까. 옷자락은 이미 흙과 피로 얼룩졌다.
됐다. 계산은 나중에 하자.
선우결은 검을 뽑았다.
스릉—
칼날에 이상한 빛이 얽혀 들었다. 손목이 저절로 움직였다. 마력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는데,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이게 뭐지, 라는 생각조차 할 틈이 없었다. 몸이 생각보다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박거석이 눈치를 챘다. 웃음기가 사라졌다.
애새끼가 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우결의 검끝에서 빛줄기가 뻗어 나갔다.
치이이이잉—
좁고 날카로운 빛의 선이 산적 두목의 목을 정확히 갈랐다.
둔탁한 소리가 아니었다. 서늘하고 얕은, 유리가 갈리는 듯한 소리였다.
박거석의 목이 뒤로 꺾였다. 거구가 그대로 무너졌다.
땅이 울렸다. 흙먼지가 확 피어올랐다.
산도가 순간 조용해졌다.
인질로 잡혀 있던 은발 소녀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살았다는 걸 아직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손으로 목을 몇 번이나 쓸어봤다. 아직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게 신기하다는 듯.
산적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졌다.
두목이 죽었다!
누가 그랬어!
마법사다! 마법사가 있었어!
여기저기서 고함이 뒤섞였다. 무기를 놓는 놈, 뒤도 안 보고 뛰는 놈, 그 자리에 얼어붙는 놈. 셋으로 갈라졌다.
기사 견습생이 그제야 앞으로 튀어나갔다.
지금이다! 밀어붙여!
자경단이 함성을 지르며 창을 세웠다. 산적들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절반은 도망치고, 절반은 그 자리에서 무기를 놓았다.
몇 명은 서로 밀치며 도망치다가 자기들끼리 넘어졌다. 자경단이 그 위로 달려들어 밧줄을 던졌다.
선우결은 검을 든 손을 내려다봤다.
지금 내가 뭘 한 거지.
머릿속이 멍했다. 방금 자기가 저지른 짓을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검에서 흘러나온 빛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냥 낡은 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웅—
낮은 진동음이 귓속에서 울렸다. 아무도 못 듣는 소리였다.
[???: 알 수 없는 마력 공명이 감지되었습니다.]
짧게 스쳐 지나가는 문구가 시야 한 귀퉁이에 떴다가 사라졌다. 붙잡을 새도 없었다.
뭐야 이거.
선우결이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문구는 다시 뜨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검을 다시 들어봤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방금 그거 헛것 봤나.
견습 기사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방금 그거, 어떻게 하신 겁니까.
모릅니다.
선우결이 솔직하게 답했다. 정말 몰랐다.
한 번 더 해보라면 못 할 것 같은데.
라는 말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견습 기사의 얼굴에 존경 반, 의심 반의 표정이 스쳤다. 뭔가 더 물으려다가 관두는 눈치였다.
은발 소녀가 절뚝이며 다가왔다. 목례를 하려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됐어요. 일단 앉아 있어요.
선우결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속으로는 손끝이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사람을 죽였다.
그 사실이 뒤늦게 몸으로 밀려왔다.
토할 것 같은데.
참았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숨을 몇 번 크게 들이쉬었다. 게임에서는 몬스터가 죽으면 그냥 빛으로 흩어졌다. 여기서는 사람이 그대로 시체가 되어 눈앞에 쓰러져 있었다. 그 차이가 뒤늦게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자경단이 산적 잔당을 밧줄로 묶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집 밖으로 나왔다.
문 뒤에 숨어 있던 노인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나와 상황을 살폈다. 아이를 업은 여자가 울먹이며 자경단원을 붙잡고 뭔가를 물었다.
산 위쪽에서 연기가 여전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두구구궁—
하늘이 진동했다.
박거석이 쓰러진 자리에서 새하얀 빛이 솟아올랐다.
기둥처럼, 곧고 거대하게.
마을 사람 전부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게 뭐야.
누군가가 소리쳤다.
빛기둥은 시체가 있던 자리를 정확히 뚫고 올라가고 있었다. 지면이 미세하게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자경단원들도 창을 놓고 뒷걸음질쳤다. 노인은 지팡이를 놓칠 뻔했다.
선우결도 검을 쥔 채 그 빛을 바라봤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건 게임에도 없던 장면인데.
빛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