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저택 앞뜰, 병사들이 갑옷을 챙기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사방에서 겹쳤다.
챙, 챙—
갑옷 부딪는 소리가 아침 공기를 갈랐다.
선우태호가 지도를 펼친 채 서 있었다. 지도 위엔 붉은 표시가 서쪽 숲 쪽으로 그어져 있었다.
놈들이 어제 도망친 잔당입니다. 스무 명 남짓, 서쪽 숲에 숨어 있다가 오늘 새벽 마을 창고를 털었습니다.
최인덕이 보고했다.
식량 절반 이상을 가져갔습니다. 겨울 대비분입니다.
선우태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사단 102분대, 즉시 출동하라.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선우결이 앞으로 나섰다.
저도 갈게요.
선우태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가?
방금 확인했어요. 저 쓸 만해요.
선우결이 검을 들어 보였다.
짧은 침묵.
선우태호의 시선이 검에서 선우결의 얼굴로, 다시 검으로 옮겨갔다.
이 아이가 어제까지만 해도 검을 제대로 쥐지도 못했는데.
의심과 기대가 뒤섞인 눈빛이었다.
선우태호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다만 견습 기사와 함께 움직여라.
견습 기사가 옆에서 손을 들었다.
제가 붙겠습니다.
최인덕도 짐 챙기는 걸 도우며 조용히 따라붙었다. 뭔가 묘하게 자연스러운 동행이었다.
굳이 안 나서도 될 자리에 자꾸 끼는군.
선우결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숲까지는 말로 반나절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선우결은 말 위에서 검을 만지작거렸다.
프리즘 소드, 사거리 확장, 관통.
괜찮은 스킬이었다. 문제는 정신력이었다.
감정이 실려야 발동한다니, 이거 은근히 까다로운 조건인데.
매번 죽은 사람 생각하면서 싸울 순 없잖아.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엔 씁쓸한 확신이 있었다. 이 몸엔 이미 감정의 재료가 넘칠 만큼 쌓여 있다는 것.
옆에서 견습 기사가 말을 걸었다.
긴장되시죠.
아니요.
선우결이 짧게 답했다.
견습 기사가 어색하게 웃었다.
숲 어귀에 도착하자 이미 산적들이 작은 야영지를 꾸리고 있었다.
모닥불 냄새가 바람에 섞여 왔다.
창고에서 훔친 곡식 자루가 쌓여 있었다.
스무 명 정도, 무장 상태가 제각각이었다. 절반은 낫이나 몽둥이 수준이었다.
견습 기사가 나무 뒤에 몸을 숙이며 손짓했다.
숫자 세보니 스물둘입니다. 예상보다 두 명 더 있네요.
최인덕이 낮게 덧붙였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은 저쪽 큰 나무 아래 있습니다. 유일하게 갑옷 조각을 걸쳤네요.
견습 기사가 낮게 말했다.
제가 신호하면 움직이시죠.
됐어요.
선우결이 말을 끊었다.
제가 먼저 갈게요.
견습 기사가 놀란 얼굴로 그를 봤다.
지금요? 아직 진형도 안 짰는데요.
선우결은 이미 말에서 내려 검을 뽑고 있었다.
칼자루를 쥔 손끝이 미묘하게 떨렸다.
떨리는 게 무서워선지, 기대돼선지는 자신도 몰랐다.
산적 하나가 그를 발견했다.
적이다!
야영지 전체가 순식간에 소란해졌다.
산적 몇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왔다.
선우결은 숨을 골랐다.
감정을 실어야 한다면,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어제 은발 소녀의 얼굴 대신, 이 몸의 원래 주인이었던 청년을 떠올렸다.
죽은 자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죄책감, 그리고 그 몫까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부채감.
머릿속에서 낯선 얼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본 적도 없는데 왜 이렇게 선명하지.
검이 다시 울렸다.
웅—
손목을 타고 서늘한 감각이 올라왔다.
치이이이잉—
빛의 화살이 연속으로 날아갔다.
한 발에 한 명씩, 몽둥이를 든 산적들이 그대로 꼬꾸라졌다.
죽이진 않았다. 관통력을 살짝 낮춰 팔다리만 노렸다.
어라, 조절도 되네.
선우결이 스스로도 놀랐다.
두 발, 세 발, 네 발.
빛의 궤적이 야영지를 가로지를 때마다 산적 하나씩 쓰러졌다.
남은 산적들이 뒷걸음질쳤다.
뭐, 뭐야 저건.
누구 하나가 몽둥이를 떨어뜨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머지도 하나둘 무기를 내렸다.
견습 기사와 자경단이 그제야 함성을 지르며 뛰어들었다.
와아아아—
말발굽 소리와 뒤섞인 함성이 야영지를 덮었다.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우두머리로 보이던 자도 결국 검 한 번 제대로 못 뽑고 포박됐다.
선우결은 검을 내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어깨가 뻐근했다. 마력을 너무 몰아 썼는지 손끝이 저렸다.
숨을 내쉴 때마다 허연 김이 피어올랐다.
이 정도로 사람이 지칠 수 있나.
몸이 자기 몸이 아닌 것 같았다.
최인덕이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대답하면서도 시야가 살짝 흔들렸다.
최인덕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짧은 순간을 선우결은 놓쳤다.
견습 기사가 뒤늦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도련님, 방금 그거 진짜 미친 실력이던데요. 스무 명 넘는 인원을 혼자서 쓸어버리시고.
운이 좋았어요.
선우결이 대충 넘겼다.
솔직히 자기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확히는 몰랐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최인덕과 견습 기사가 잠깐 눈빛을 주고받는 걸 봤다.
짧았지만, 분명 뭔가를 확인하는 듯한 눈짓이었다.
뭐지, 저 눈빛.
한 번이면 우연이겠지만,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었다.
선우결이 물었다.
뭐가 이상하십니까.
최인덕이 태연하게 답했다.
아니요.
옆에 있던 견습 기사도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선우결은 일단 넘겼다. 지금은 몸이 너무 무거웠다.
당장 캐물을 힘도 없다는 게 더 짜증났다.
산적 잔당을 포박하고 곡식 자루를 회수했다.
곡식 자루를 말 등에 싣는 병사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우두머리는 따로 묶여 마차에 실렸다.
돌아가는 길, 선우결은 말 위에서 눈을 감았다.
검을 너무 몰아 쓴 탓인지 손끝의 저림이 팔뚝까지 올라와 있었다.
이거 괜찮은 건가.
걱정이 스쳤지만, 애써 무시했다.
지금 티 냈다간 또 무슨 눈짓이 오갈지 모르니까.
저택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견습 기사가 최인덕에게 작게 속삭이는 소리를 얼핏 들었다.
백작님께 보고할 내용이 늘었네요.
보고요?
선우결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둘의 표정이 순식간에 태연해졌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최인덕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 미소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입꼬리는 올라갔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선우결은 팔뚝에 남은 저림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이 둘, 그냥 호위나 시종이 아닌 것 같은데.
말발굽 소리가 저택 정문에 가까워질수록 커졌다.
정문 앞엔 이미 선우태호가 팔짱을 하고 서 있었다. 소식이 벌써 전해진 모양이었다.
선우태호의 표정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기다렸다는 듯한, 혹은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선우결은 그 눈빛을 보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뭔가 잘못 짚은 건가.
말에서 내리는 순간, 선우태호가 입을 열었다.
수고했다.
짧은 한마디였다.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질 말이, 유독 뜸을 들이는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