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선배, 저 없인 안 될걸요

5화

훈련소 졸업, 서임식 날. 새벽 다섯 시, 훈련소 막사 안은 이미 부산스러웠다. 동기들은 저마다 다림질한 예복을 걸어놓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나는 배정받은 예복을 침대 위에 펼쳐놓고 한동안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옷감은 두꺼운 무명이었고, 소매 끝에 얇은 금색 실선이 한 줄 박혀 있었다. 평민 출신 졸업생에게 지급되는 표준 예복이었다. 옆 침대의 하람은 벌써 옷을 다 입고 단추를 세고 있었다. "단추가 열두 개네." 하람이 중얼거렸다. "어제는 열한 개였는데." "내 것도 세어봐야겠다." 내가 대답했다. 시시한 대화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편했다. 누구의 아들이냐, 몇 등이냐를 따지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으니까. 그 편안함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오전 여덟 시, 우리는 대열을 맞춰 왕궁으로 이동했다. 훈련소에서 왕궁까지는 걸어서 삼십 분 거리였는데, 그 삼십 분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들 각자의 긴장을 씹어 삼키는 얼굴이었다. 왕궁 앞뜰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귀족들은 화려한 예복을 입고 앞줄을 차지했고, 평민 구경꾼들은 뒤편에서 목을 늘여 안쪽을 살폈다. 연단 위에는 국왕과 대신들이 앉아 있었다. 연단 뒤쪽으로는 붉은 천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천에는 왕가의 문장이 금실로 수놓여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색감이었다. 나는 그 화려함이 낯설어서 자꾸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나와 하람은 졸업생 대열 맨 끝에 서 있었다. 졸업생 서열은 성적순이었고, 나는 전체 2위였다. 1위 자리에는 다른 이름이 붙어 있었다. 한도현. 한서 공작의 아들이었다. 키가 크고, 은발을 뒤로 넘긴 화려한 인상이었다. 예복에는 보석이 촘촘히 박혀 있었는데, 언뜻 봐도 값이 상당해 보였다. 내 옆에 있던 동기가 작게 속삭였다. "저 예복 하나에 성 한 채 값이라던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평민 나부랭이가 2등이라니, 채점관이 눈이 삐었나." 도현이 옆줄 친구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크게 말한 것 같았다. 친구가 낮게 웃었다. "그러게요, 도현 님. 시험지가 잘못 채점된 거 아닙니까." 나는 못 들은 척했다. 하람은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어깨를 한 번 들었다 내렸는데, 그게 오히려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서임식이 시작되자 국왕이 차례로 이름을 불렀다. "한도현, 앞으로." 도현이 걸어 나가자 관중석에서 큰 환호가 터졌다. 국왕이 직접 검을 내려주며 말했다. "그대에게 용사의 이름을 내린다." 도현이 검을 받아 들고 관중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환호가 더 커졌다. 귀족들이 앉은 앞줄에서는 기립까지 나왔다. 누군가는 그의 이름을 연호했고, 누군가는 손수건을 흔들었다. 검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그 빛이 앞줄까지 튕겨나가는 것 같았다. "강태오, 앞으로." 내 이름이 불렸을 때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박수 소리가 절반도 안 됐고, 몇몇은 자리에서 대놓고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봤다. 연단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거리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국왕은 나에게도 검을 내려주었지만, 방금 도현에게 했던 것과 같은 축사는 하지 않았다. "...그대에게도 용사의 이름을 내린다." 그게 전부였다. 나는 검을 받아 들고 관중을 향해 고개만 숙였다. 박수는 짧게 끝났다. 검을 쥔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연단에서 내려오면서, 나는 검의 무게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쇠는 차가웠고, 손잡이는 낯설었다. '이게 정말 내 것이 맞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행사가 끝난 뒤, 연회장에서 나는 구석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은쟁반에 담긴 과일과 포도주 잔이 놓여 있었는데, 손을 대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귀족 자제들은 서로 무리를 지어 도현 주변에 모여 있었다. 하람도 그 무리 근처에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구경하듯 서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도현이 하람을 향해 손짓하자, 하람이 순순히 다가갔다. "윤하람, 남작가 셋째 맞지?" 도현이 하람에게 말을 걸었다. "너 성적 괜찮았다며. 우리 쪽 사람이 될 자격 있어." 주변 무리가 하람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평가하는 눈빛이었다. 하람은 그 시선을 받으며 등을 곧게 세웠다. 하람은 순간 나를 힐끗 돌아봤다. 나와 눈이 잠깐 마주쳤다. 그 짧은 순간, 나는 하람이 뭔가 말해주길 기다렸다. '같이 가자'는 말도, '나는 신경 쓰지 마'라는 말도 아무거나 좋았다. 하지만 하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하람은 시선을 거두고 도현에게로 몸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도현 님." 그 대답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주변 무리가 웃으며 하람의 어깨를 두드렸다. 누군가는 벌써 하람에게 술을 따라주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정해진 절차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나는 술잔을 든 채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특별히 서운하지는 않았다. 원래 이런 자리가 어색하고 불편했으니까.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뭔가가 조금씩 식어가는 걸 느꼈다. 술잔 속 포도주는 손도 대지 않았는데 이미 미지근해져 있었다. 나는 그 미지근함이 꼭 지금 이 순간 같다고 생각했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도현이 내가 있는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뒤따르던 무리도 함께 움직였고, 몇몇은 벌써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강태오라고 했나."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평민 출신이 용사 자리까지 오다니, 신기한 일이야." "...감사합니다." 내가 짧게 대답했다. "감사할 것 없어. 그냥 신기해서 하는 말이야." 도현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 웃음은 눈까지 닿지 않았다. "근데 말이야, 용사라는 자리가 성적으로만 정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앞으로 알게 될 거야." 나는 그 말의 뜻을 되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현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가 돌아서서 걸어갔다. 뒤따르던 무리 중에 하람도 섞여 있었다. 하람은 이번에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방금 그 말이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라는 걸,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연회장의 소음이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막사로 돌아온 하람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떠들며 웃었을 텐데, 그는 침대에 누워 등을 돌린 채 조용히 있었다. 촛불 하나가 창틀에 놓여 있었고, 그 불빛이 하람의 등을 희미하게 비췄다. 나는 몇 번이나 말을 걸까 고민했다. "오늘 어땠어." 겨우 그 한마디를 꺼냈다. 하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숨소리만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잠든 척인지, 정말 잠든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뭔가 변하고 있어.' 촛불이 다 타들어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나는 검을 침대 옆에 세워두고, 그 옆에 누웠다. 쇠붙이 냄새가 코끝에 오래 남았다. 그 예감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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