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입학식 날의 소란이 가라앉은 것은 해가 완전히 저물고 난 뒤였다. 백로 왕립 귀족 학원의 여자 기숙사 복도에는 여전히 낮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학생들의 수군거림이 낮게 깔려 있었고, 서아라는 그 시선들을 등 뒤로 느끼며 자신에게 배정된 방문 앞에 멈춰 섰다.
복도를 걸어오는 내내 등 뒤에서 따라붙던 시선들이 아직도 살갗에 닿아 있는 것 같았다. "저 애가……." "설마 진짜로……." 하는 식의 토막 난 말들이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것처럼 귓가에 맴돌았고, 아라는 애써 그 소리들을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지만 발끝이 자꾸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것이 추워서인지 아니면 오늘 대전 앞에서 벌어진 일 때문인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왕태자가, 그 이시우가,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가리켜 '내 성녀'라 선언했을 때, 아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슬무슬 흩날리던 벚꽃잎 사이로 왕태자의 손이 아라의 손목을 붙잡았던 감각이 아직도 손목께에 남아 있는 것 같았고, 그 순간 대전 앞에 모인 수백 명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로 쏠렸던 기억은 지금도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 짧은 순간 세상이 온통 하나의 눈동자가 되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고, 아라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눈동자들 속에서 유일하게 다정했던 것은 이시우의 시선뿐이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무섭게 다가왔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아라는 침대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평민 출신 고아가, 남작가의 양녀로 겨우 자리를 잡았을 뿐인데, 왕태자의 선언 한 번에 학원 전체의 표적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라의 가장 큰 걱정은 수업 진도를 따라갈 수 있을지, 기숙사 식당의 밥값이 예상보다 비싸지는 않을지 하는, 지극히 소소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하루 사이에 걱정의 크기가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선과 수군거림을 견뎌야 할지 생각하니 속이 메슥거렸고, 배정받은 방이 유독 넓고 좋다는 사실조차 이제는 반갑지 않았다. 좋은 방을 받은 이유가 뻔히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창문 밖에서 파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새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크고, 짐승이라고 하기엔 너무 정교한 깃털을 가진 존재가 창틀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는데, 회백색 깃털이 달빛을 받아 마치 세공된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것이 성령조 설우라는 것을 아라는 곧 알아차렸다.
"임무 알림." 설우가 낮고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 이후로 대상자의 이동 경로 및 접촉 인물은 본 성령조가 상시 감시한다. 이는 대성녀님의 명이며, 동시에……" 설우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왕태자궁의 요청 사항이기도 하다."
"요청 사항이라니, 그게 뭔데?" 아라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목소리에는 반가움보다는 경계심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낯선 세계로 떨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자신의 일상이 남의 손에 좌우되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기 때문이다.
설우는 종잇조각 하나를 부리에서 떨어뜨렸는데, 그것이 팔랑거리며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사형선고문 같아서 아라는 좀처럼 주울 마음이 나지 않았다. 창틀에 걸터앉은 설우는 그런 아라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눈으로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마치 이 방 자체가 이미 감시 대상 목록에 포함된 것처럼.
"안 주울 텐가." 설우가 물었다.
"주울 거야. 그냥…… 마음의 준비가 좀 필요해서 그래." 아라는 중얼거리며 결국 한참을 노려보다가 종이를 집어 들었다. 딱딱한 필체로 몇 가지 조항이 적혀 있었다.
하나, 왕태자의 허락 없이는 타 남학생과 사적으로 대화하지 말 것.
둘, 매일 오후 다섯 시에는 왕태자궁의 정원에서 보고할 것.
셋, 외출 시에는 반드시 사전에 왕태자궁에 통보할 것.
"이, 이게 보호냐 감금이냐……." 아라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 이런 조항을 지키다가는 학업은커녕 숨 쉬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할 판이었다. 그것도 성녀 후보로서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인데, 저 다섯 시 보고라는 것 때문에 매일 하루 일정을 통째로 뒤엎어야 한다니, 이건 뭐 학원생활이 아니라 반쯤 궁정 시녀살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게다가 왕태자궁 정원까지 매일 왕복하려면 대체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지, 그 시간에 차라리 마법 이론서 한 챕터를 더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계산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굴러갔다. 이런 것까지 따져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프면서도 조금은 웃겼다.
"첫 번째 조항은 좀 심한 것 같은데. 남학생하고 대화도 하지 말라니, 그럼 수업 조 편성은 어떻게 하라는 거야?" 아라가 종이를 흔들며 따지듯 물었다.
"본 성령조는 조항의 타당성을 판단하지 않는다." 설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덧붙였다. "본 성령조는 전달자일 뿐, 결정권자가 아니다."
"그래, 그건 알겠는데……." 아라는 종이를 구겨질세라 조심스럽게 접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낯선 세계의, 아니, 낯선 신분의 법칙들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실감되자 어깨가 절로 축 늘어졌다. "설우, 넌 매일 여기 이렇게 있을 거야?"
"그것이 임무다." 설우가 대답했다. "불편한가."
"불편하다기보다는……." 아라는 말끝을 흐렸다. 사실 불편했다. 창밖에 누군가가, 아니 무언가가 늘 앉아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상대가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해도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싫다고 말하기에는, 설우의 무심한 눈동자가 왠지 상처받을 것 같아서 차마 그 말을 끝맺지 못했다.
설우는 별다른 대답 없이 날개를 접고 창틀에 자리를 잡았다. 더 이상 대화할 의사가 없다는 듬직한 침묵이었다.
그날 밤, 아라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한 채 창밖의 별을 바라보았다. 한기수 남작이 보내온 짧은 편지 한 장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딱 한 줄, '몸조심하렴, 무슨 일이든 참지 말고 알려라'라는 문장뿐이었다. 무뚝뚝한 사람이 쓴 것치고는 지나치게 짧고, 그래서 더 마음이 쓰였다. 편지지의 귀퉁이가 살짝 접혀 있는 것을 보니, 그가 이 짧은 문장을 쓰기 위해 몇 번이나 종이를 구겼다가 다시 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상상을 하자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라는 얼른 편지를 접어 서랍 속에 밀어 넣었다.
서아라는 종이를 이불 속에 밀어 넣고 눈을 감았다. 내일부터는, 이 낯선 학원에서 낯선 사람들과, 그리고 낯선 왕태자의 그늘 아래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한다는 사실이 무겁게 가슴을 눌러왔다. 눈을 감아도 잠은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고, 대전 앞에서 자신을 붙잡았던 손의 온도와, 그 순간 시우의 눈동자에 담겨 있던 이상한 확신 같은 것이 자꾸만 눈앞에 되살아났다. 그것이 두려움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아라는 도무지 정확히 명명할 수 없었다.
창밖의 설우는 여전히 창틀에 앉아 조용히 아라의 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쩐지 감시자가 아니라 외로운 밤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파수꾼의 눈동자 너머, 아주 멀리 왕궁의 어느 창문에서도, 누군가가 이쪽을 바라보며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서아라는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