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마을로 내려오는 길 내내,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정보를 뜯어보는 데에 몰두했다. 그 이유는, 지구의 기억 덕분에 이런 시스템이라는 것에 어렴풋이 익숙했기 때문이었는데—그 기억 속 인물이 게임이라는 것을 꽤나 즐겼던 모양인지, '스킬', '경험치', '등급' 같은 개념들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다만 그 지식이 실전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게임과 현실은 다르다는 걸, 지구의 기억을 가진 그 누군가도 알고 있었을 텐데, 정작 그 몸의 주인이었던 나는 이제 그 게임적 지식을 현실에서 검증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는 게 좀 아이러니했다.
[스킬: 지식의 서고 (Lv.1)]
[설명: 각성자가 보유한 이계의 지식을 전투 및 생활 전반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스킬 레벨이 상승할수록 지식의 정밀도와 응용력이 증가합니다.]
스킬창에 딸랑 하나 떠 있는 이 스킬이 전부라는 게 조금 허탈했다. '지식의 서고'라니, 이름은 그럴싸한데 정확히 뭘 할 수 있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검이나 불꽃 같은 화려한 스킬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뭔가 좀 더 즉각적으로 쓸모 있어 보이는 걸 바랐던 게 사실이었다. 나는 시험 삼아 길가에 놓인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고 '이 돌의 성분을 분석해줘' 하고 속으로 되뇌어보았다. 그러자 눈앞에 자잘한 정보들이 스쳐 지나갔다—규산염 광물, 경도 몇 도, 대략적인 형성 연대까지. '...개사긴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이게 당장 내 목숨을 구해줄 만한 능력인가 하면 또 애매했다. 몬스터가 나타났을 때 "이 몬스터는 갑각류 계열이며 껍질의 경도는 대략..." 하고 분석해봤자, 그걸 알아낸 시간 동안 이미 내 목이 뜯겨 있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다른 시험을 해봤다. 길바닥에 삐죽 솟은 잡초 하나를 뽑아 들고, '이거 먹어도 되나' 하고 물어봤다. 즉시 정보가 떠올랐다—식용 가능, 독성 없음, 다만 맛은 형편없을 것으로 추정됨.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목숨이 걸린 순간에는 별 도움 안 되는 스킬이 이런 데서는 은근히 알뿌리 같은 실용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산에서 며칠을 굶어 죽을 뻔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 터라, 이건 나름 감사한 능력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중요한 건 힘이었다. 상태창에 찍힌 힘 3, 민첩 3이라는 초라한 숫자가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이 숫자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도 감이 안 왔다. 인간의 평균치가 몇인지 비교할 기준조차 없었으니까. 마을 어귀에 다다랐을 때 나는 문득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옆에 서 있던 커다란 바위를 향해 손을 뻗어봤다. 사람 하나 키만 한 크기의, 이끼가 잔뜩 낀 바위였다. 밀어봤자 꿈쩍도 안 할 게 뻔했으니까, 그냥 확인 삼아서였다. 서른 일이라는 시한부 숫자를 안고 사는 처지에, 적어도 내가 가진 무기가 뭔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콰악!
바위가 반쪼가리로 쪼개지며 옆으로 밀려났다. 굉음이 마을 어귀에 울려 퍼졌고, 나는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내 손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손바닥에 남은 감각은 마치 두부를 눌렀을 때 느껴지는 것과 비슷했다—단단한 무언가를 짓눌렀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부드럽게 밀려들어간 느낌. '...이게, 힘 3짜리 몸으로 되는 거였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곧바로 눈앞에 새로운 알림이 떠오르며 그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안내: '지식의 서고'의 하위 효과로, 신체 각 부위에 최적의 힘 분배와 타이밍을 자동 계산하여 적용합니다. 이는 물리적 스탯과 무관하게 작동합니다.]
요컨대, 힘 수치 자체는 초라할지언정 그 힘을 '어떻게 쓰는가'를 지구의 지식이 계산해서 최적으로 뽑아낸다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여전히 평범한 청년의 몸이지만, 그 평범한 몸을 인체공학적으로 완벽하게 굴리는 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것만으로도 바위를 쪼갤 정도의 결과가 나온다는 소리였다. 무술 하나 배워본 적 없는 몸으로, 최적의 각도와 최적의 힘점과 최적의 타이밍을 계산해서 내지르는 주먹질이라니. 어쩌면 이건 격투기 선수가 십 년 넘게 갈고닦은 감각을, 나는 그냥 스킬 하나로 대체하고 있는 셈이었다. '...더럽게 쓸모 있네.' 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근력 자체가 늘어난 건 아니니, 지속적으로 무거운 걸 들거나 오래 버텨야 하는 상황에서는 한계가 있을 터였다. 결국 이 스킬은 '한 방'에 특화된 능력이지, '지속전'에는 별 도움이 안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전투 방식도 그에 맞춰 짜야 한다는 계산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단발성 타격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식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을 광장을 지나던 참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시간이라 광장에는 하루 장사를 마무리하려는 상인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뒤섞여 왁자지껄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광경인데, 그날은 유난히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낯선 복장을 한 남자 몇이 한 소녀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 소녀는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목에는 쇠로 만든 목줄이 걸려 있었는데, 그 차가운 금속이 소녀의 하얀 목덜미를 파고들고 있는 모양이 한눈에 봐도 불편해 보였다. 목줄에는 사슬이 달려 있었고, 그 사슬 끝을 덩치 큰 남자가 손목에 두어 번 감아 쥐고 있었다.
"이 계집이 또 도망치려고 했다니까?" 하고 남자 하나가 발로 소녀의 등을 걷어차며 말했고, 소녀는 억, 하는 소리를 삼키며 몸을 웅크렸다. 발길질이 꽤나 세게 들어갔는지, 소녀의 몸이 앞으로 밀려나며 흙바닥에 이마를 박을 뻔했다.
"북방 족속들은 다 이런 식이지. 은혜도 모르는 것들." 하고 옆에 선 다른 남자가 침을 뱉으며 거들었다. 그의 어조에는 조금의 죄책감도 섞여 있지 않았다. 마치 개가 짖는다고 나무라는 듯한, 그런 태연함이었다.
소하촌에도 노예를 부리는 집이 몇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폭력을 휘두르는 광경을 목격한 건 처음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그 옆을 지나치며 눈길만 한번 주고 마는 게 전부였는데, 몇몇은 오히려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혀를 차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게 이 세계에서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노예 매매도, 그에 따른 폭력도, 마치 날씨 이야기처럼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지는 풍경. 지구에서 이런 광경을 봤다면 누군가는 휴대폰을 꺼내 촬영을 하고, 누군가는 신고를 하겠다며 소란을 피웠을 텐데, 여기서는 그런 반응조차 사치였다.
나는 걸음을 멈춘 채 그 소녀를 바라봤다. 헝클어진 은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얼굴이 지나치게 어렸다. 열다섯이나 열여섯쯤 되었을까. 뺨에는 오래된 상처와 새로 생긴 것 같은 멍이 뒤섞여 있었고, 옷은 낡아서 여기저기 헤져 있었다. 눈은 이미 초점을 잃은 지 오래인 듯했고, 그 눈빛에는 어떤 저항의 의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냥 흙바닥의 얼룩을 보는 것 같은, 텅 빈 시선이었다.
'그냥 지나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서른 일이라는 숫자가 머릿속에 여전히 박혀 있었고, 지금은 탑을 찾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남의 일에 끼어들 여유는 없다는 게 이성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이 세계의 법이 어떤 식인지도 모르고, 저 남자들이 정말로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확인 못한 상태였다. 어쩌면 노예상 뒤에는 이 마을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세력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무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머리는 계속 '멈춰, 멈춰' 하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는데, 발은 그 신호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몸에 밴 성정이라는 게, 지구의 기억보다 더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거기, 그만하시죠." 라고 말을 건넸는데, 목소리가 스스로도 낯설 만큼 단단하게 나왔다. 속으로는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으면서도, 겉으로 나온 목소리는 어이없을 만큼 차분했다.
남자들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다섯 명쯤이었다. 하나같이 가죽 갑옷을 걸치고 허리에 무기를 찬 모습이었는데, 딱 봐도 용병 같은 인상이었다. "뭐야, 넌." 하고 그중 덩치가 가장 큰 남자가 되물었는데, 그 눈빛에 담긴 건 경계심이 아니라 순전한 짜증이었다. 나 같은 산골 촌뜨기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태도였다. 옷차림만 봐도 내가 얼마나 초라해 보였을지 짐작이 갔다—낡은 삼베옷에 흙먼지가 잔뜩 묻은 발.
"이 아이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때리는 겁니까." 하고 다시 물었지만, 남자는 대답 대신 소녀의 목줄을 잡고 홱 끌어당기며 웃었다. 소녀의 몸이 힘없이 끌려가며 목줄이 목을 조이는 게 눈에 보였다.
"뭘 잘못했냐고? 이 물건은 노예상 조태민 님 소속이야. 우리가 뭘 하든 말든 니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거지." 하고 그가 말했고, 나는 그 순간 조태민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어딘가 낯익은 이름 같기도 했는데, 정확히 기억나진 않았다. 이 소하촌 근방에서 제법 이름값이 있는 인물인 모양이었다.
소녀가 고개를 살짝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 짧은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에서 나는 뭔가를 읽었는데—그건 기대도 희망도 아니었다. 그저 '또 무슨 일이 생기든 상관없다'는, 이미 모든 걸 포기한 사람의 무기력함이었다. 마치 이런 상황을 몇 번이나 겪어봐서, 누가 나서건 결국 상황은 나빠지기만 한다는 걸 학습해버린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 표정이 유난히 마음에 걸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 아이가 나서주는 사람마저 원망할까 봐 걱정이 됐다.
"당장 그 아이 손 놓으시죠." 라고 말했지만,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칼날이 저녁 햇살을 받아 번쩍하고 빛을 뿜었고, 주변에 몰려 있던 구경꾼 몇몇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이제 이 상황이 진짜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 순간 나는 이게 말로 끝날 상황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