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벽 다섯 시, 나는 무쇠솥에 물을 받았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온 지 벌써 세 번째였다.
등불마을의 아침은 여관촌답게 일찍 시작된다. 짐마차꾼들이 첫 손님이고, 그다음은 국경 순찰을 나가는 병사들이었다.
여관촌 특유의 냄새가 났다. 마른 건초와 말똥, 그리고 어디선가 풍겨오는 숯불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온기식당은 열두 평 남짓한 작은 밥집이다. 나무 식탁 여섯 개, 낡은 화덕 하나, 그리고 벽에 걸린 국자 세 개가 이 집의 전부였다.
식탁 다리 하나는 나무토막을 괴어놓아야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무를 썰면서 오늘 들어올 손님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짐꾼 박씨 아저씨는 요즘 허리가 아프다고 했으니 뜨거운 국물을 더 부어줘야 했다.
마부 정씨는 어제 술을 많이 마셨는지 얼굴이 부어 있었으니 해장국이 필요할 것이었다.
순찰병 중 막내인 강씨는 유독 짠맛을 좋아했으니 간을 조금 더 세게 봐야 했다.
'조금만 짜게, 조금만 뜨겁게.' 나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간을 맞췄다.
전생에 간호사였던 습관은 이 세계에 와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의 낯빛만 보면 어디가 아픈지, 뭐가 필요한지 대충 짐작이 갔다.
눈 밑이 검으면 밤새 앓았다는 뜻이고, 입술이 마르면 열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 능력으로 밥집을 십칠 년째 꾸려온 셈이었다.
십칠 년이라니. 손끝으로 무를 썰면서도 가끔 그 세월이 실감 나지 않았다.
이 세계로 넘어왔던 그날의 기억은 이제 흐릿했지만, 몸에 남은 습관들은 여전히 선명했다.
"주인장, 오늘도 일찍 나오셨네."
박씨 아저씨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그의 어깨에는 여전히 짐을 지고 다닌 흔적인 굳은살이 두껍게 박혀 있었다.
"허리는 좀 어때요?"
내가 물었다.
"여전하지 뭐, 그래도 여기 국물 마시면 낫는 것 같아."
그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나는 뜨거운 뭇국을 한 그릇 더 부어 그의 앞에 놓았다.
"고맙수."
그가 숟가락을 들며 말했다.
곧이어 정씨가 들어왔다. 얼굴이 어제보다 더 부어 있었다.
"어제 많이 드셨나 봐요."
내가 물었다.
"말도 마오, 촌장이 술을 얼마나 권하던지."
정씨가 이마를 짚으며 대답했다.
나는 콩나물을 듬뿍 넣은 해장국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거 드시고 속 좀 푸세요."
"고맙소, 주인장."
손님들이 하나둘 들어차고, 식당 안은 금세 밥그릇 부딪치는 소리와 국물 넘어가는 소리로 가득 찼다.
강씨를 비롯한 순찰병 셋도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갑옷이 아직 덜 마른 이슬에 젖어 있었다.
"주인장, 오늘도 짠 국 부탁이오."
강씨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미리 따로 덜어둔 짠 국을 그의 앞에 놓았다.
그렇게 한 시간쯤이 지났을 때였다.
식당 안은 조금씩 한산해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손님들이 밥을 먹고 각자의 일터로 나선 뒤였다.
박씨 아저씨만 아직 남아 국물을 천천히 들이켜고 있었다.
식당 밖에서 낯선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등불마을에는 흔치 않은 소리였다. 마차라면 대부분 짐마차였는데, 이건 말발굽 소리부터가 달랐다.
또각또각, 규칙적이고 절도 있는 소리였다.
짐마차의 말발굽은 늘 불규칙하고 무거웠다. 이 소리는 그것과 전혀 달랐다.
박씨 아저씨도 국물을 마시다 말고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게 뭔 소리요?"
그가 중얼거렸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말발굽 소리가 식당 바로 앞에서 멈췄다.
문이 벌컥 열렸다.
검은 관복을 입은 남자가 들어섰다. 나이는 서른 안팎으로 보였고, 허리춤에는 금색 인장이 박힌 목함을 차고 있었다.
관복의 옷깃에는 낯선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 마을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양이었다.
"이곳이 온기식당인가?"
그가 물었다.
말투부터가 이 마을 사람들과는 달랐다. 반말과 존대말의 경계가 애매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어투였다.
"네, 맞습니다만."
내가 대답했다.
"서혜란이라는 사람을 찾는다."
그가 목함을 꺼내며 말했다.
나는 손에 든 국자를 슬며시 내려놓았다.
'왜 내 이름을 알고 있지.'
심장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십칠 년 동안 이 이름으로 조용히 살아왔다. 아무도 나를 찾을 이유가 없었다.
'혹시 세금 문제인가. 아니면 무슨 신고가 들어간 건가.'
머릿속으로 온갖 가능성을 빠르게 계산했다.
"제가 서혜란입니다."
내가 말했다.
남자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시선에는 밥집 주인 따위가 왜 왕실의 부름을 받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
낡은 앞치마와 밥알이 튄 소매를 보는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왕세자 저하의 명으로 왔다."
그가 목함을 열며 말했다.
식당 안의 손님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박씨 아저씨의 숟가락이 국그릇에 닿는 소리조차 크게 들렸다.
나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목함 안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왕세자가 왜.'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