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장례식은 예상보다 화려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저택 앞마당부터 줄을 서서 조의를 표했다. 줄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상석에 앉아 그 줄을 내려다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 다 진짜로 슬픈 걸까, 아니면 나처럼 자리 값을 계산하고 있는 걸까.
이 느낌, 나쁘지 않았다.
전생에는 상갓집 알바로 육개장 나르던 처지였는데. 그때는 국물 튀면 죄송하다고 허리를 굽혔고, 지금은 그냥 앉아서 고개만 까딱해도 사람들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 참 불공평하다. 근데 이번엔 그 불공평이 내 편이니까 딱히 항의할 마음은 없었다.
"후작님, 애도를 표합니다."
"그렇군요."
"후작님, 삼가 위로의 말씀을 올립니다."
"예."
대충 대답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조문객이 백 번쯤 인사를 하면 나는 백 번쯤 “예”,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세 마디를 돌려썼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표정이 상하지 않았다. 이게 권력이구나. 편의점 알바 시절엔 손님이 반말만 해도 죄인처럼 굴었는데, 지금은 내가 성의 없게 굴어도 다들 고개를 숙였다. 이 낙차가 너무 커서 잠깐 현실감이 없어질 지경이었다.
장례가 끝나고 며칠은 그냥 즐겼다.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매일 다른 요리가 나왔고, 옷장에는 내가 입어본 적 없는 재질의 셔츠가 즐비했다. 실크인지 뭔지, 만지면 손끝이 그대로 미끄러지는 그런 옷들. 전생엔 다이소에서 산 티셔츠도 삼 년은 입었는데. 시녀들이 아침마다 문을 두드리며 오늘의 일정을 물었다.
“후작님, 오늘은 정원 산책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서재에서 책을 읽으시겠습니까.”
“음… 둘 다요.”
“알겠습니다.”
거절당할 걱정 없이 아무 말이나 던져도 되는 삶. 이게 인생이지. 이게 사람 사는 거지. 아침에 눈뜨면 배가 고프기도 전에 식사가 준비되고, 옷을 고르기도 전에 다림질된 옷이 걸려 있고,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누군가 문을 열어줬다. 전생에 지하철 막차 시간 맞추려고 뛰던 나와, 지금 소파에 늘어져 포도를 까먹는 나는 같은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 집사 허태석을 처음 제대로 마주쳤다.
“후작님, 재정 보고를 드려야 합니다.”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절도 있는 걸음걸이엔 오랜 세월이 배어 있었다. 걸을 때마다 등이 곧게 펴져 있는 게, 딱 봐도 “전 이 가문에 뼈를 묻었습니다” 같은 아우라를 풍겼다. 전대 후작 때부터 있었다고 했다. 딱 봐도 충신 캐릭터였다. 사극이었으면 마지막에 눈물 흘리며 “나으리…” 하고 부르는 역할.
그런데 서류를 펼치는 순간 뭔가 이상했다.
숫자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는데, 처음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근데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가는 순간 손이 멈췄다.
“영지 세수는 안정적입니다만, 지출이 다소 과중합니다.”
다소, 라는 말로 넘길 수치가 아니었다. 나는 전생에 물류창고에서 재고표 맞추던 사람이다. 숫자가 안 맞으면 몸이 먼저 반응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눈이 자동으로 소수점 뒤까지 훑는다. 재고 하나 안 맞아도 팀장한테 불려가던 몸이었다.
“이 약값이 이거밖에 안 되는데 만찬용 포도주 값은 왜 세 배죠.”
허태석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딱 그 반응. 나쁜 짓 들켰을 때 사람이 짓는 그 특유의 미동.
“전통적으로 귀빈 접대는—”
“귀빈이 매일 오나요?”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왜 매달 포도주 값이 나가죠.”
허태석은 대답 대신 웃었다. 그 웃음이 마음에 안 들었다. 인자하고,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애송이가 뭘 알겠어” 하는 뉘앙스가 살짝 섞인 웃음. 전생에 사장이 딱 저런 표정으로 야근 수당을 씹어먹었었다. “김대리, 그거 관례야. 원래 그렇게 해왔어.” 그 말 한 마디로 삼 년치 수당이 증발했었다.
나는 서류를 더 뒤졌다. 손끝이 종이를 넘길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금고는 텅텅 비어 있는데 가신들 봉급은 꾸준히 나가고 있었다. 심지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직함으로 두 명분의 급여가 더 빠져나가고 있었다. 영지 도로 보수 예산은 삼 년째 집행이 안 됐는데 저택 정원 조경 예산은 매년 갱신됐다. 삼 년 동안 도로에 구덩이가 늘어나는 사이, 정원의 장미 넝쿨은 매년 새로 심어졌다는 뜻이다.
이건 뭐지.
뭐긴 뭐야. 횡령이지.
분노가 치솟았다. 전생에 사장한테 뜯긴 돈, 팀장한테 갈취당한 시간, 그거랑 똑같은 냄새가 났다. 서류 냄새인데 왜 이렇게 익숙하지. 이번엔 내가 뜯기는 쪽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물려받은 이 가문 자체가 벌써 누군가에게 뜯기고 있었다. 죽은 아버지의 몸으로 죽은 아버지의 돈이 새고 있는 걸 보는 기분은, 뭐라 설명하기가 애매했다. 억울한데 억울해할 대상이 나인 것 같기도 하고.
“허태석.”
“예, 후작님.”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낮게 깔렸다. 전생에 재고 부족분을 팀장 앞에서 조목조목 짚어낼 때 쓰던 그 목소리였다.
“당신, 그리고 여기 관련된 사람들 전부 해고합니다.”
방 안이 얼어붙었다. 허태석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부드럽던 눈매가 순식간에 딱딱해졌다.
“후작님, 그건—”
“오늘 안으로 짐 챙겨서 나가세요.”
“후작님, 이 저택의 살림을 아는 사람이 저 하나입니다. 지금 저를 내치시면—”
“알아서 잘 돌아가겠죠. 이만큼 잘 빼먹었으니 노하우는 다 배웠을 텐데.”
말은 그렇게 시원하게 했다. 속이 다 후련했다. 전생에 사장 얼굴에 사직서 던지고 싶었던 순간이 몇 번인데, 이번엔 진짜로 사람을 자를 수 있는 위치였다. 이 맛에 권력을 갖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나는 깨달았다.
저녁 종이 울릴 시간이 지났는데도 주방에서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평소라면 지금쯤 고기 굽는 냄새가 복도까지 퍼졌어야 했다. 문을 열어봤다. 텅 비어 있었다.
요리사도 나갔고, 시녀도 나갔고, 정원사도 나갔다는 것을. 허태석 라인으로 얽혀 있던 사람들이 죄다 한 몸처럼 짐을 싸서 사라졌다는 것을. 나는 그냥 부정 저지른 몇 명만 자를 생각이었는데, “관련된 사람들 전부”라는 말이 이렇게 광범위하게 적용될 줄은 몰랐다.
밥 차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저택 안은 조용했다. 아니, 너무 조용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발소리, 접시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로 가득했던 곳이 이렇게 텅 빌 수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났다.
배가 고팠다. 미친 듯이 고팠다.
부엌으로 가봤지만 불조차 켜는 법을 몰랐다. 후작이라는 몸으로 27년을 살았는데 이 몸의 전생, 아니 이 몸 본래의 기억 속에는 부엌에 들어가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찬장을 뒤졌다. 밀가루 포대, 말라붙은 향신료,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병들. 이걸로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